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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11. 2015

사랑처럼 간단하고 기본적인

니콜 모니스

                                                                                                                                                                                                                                                                                                                                                                                                                                                         

    장 보러 갔다가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서점에 간다. 신간 코너 한 번 둘러보고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어서 소설 쪽에 갔다가 비닐로 싸여 있어 들춰보지 못하게 포장한 책을 만났다. 아마도 사진이 적당히 들어가고 글은 술술 읽히는 부담 없는 책일 테니 주방에서 국을 끓이며 읽기에 좋을 거라는 생각으로 집어 들었다. 예상이 빗나갔다. 그러나 즐거웠다. 담백한 문장들은 요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생기를 띠고 날아올랐다. 오랜만에 만난 경쾌한 몰입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요리 평론가 메기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고 일 년쯤 후에 변호사였던 남편이 가끔 출장을 가곤 했던 중국에서 친자확인 소송이 제기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떠난다. 남편을 잃은 당시에도 일을 쉬지 않았던 그녀인지라 중국에 가면서도 일거리가 있어야 마음이 편할 거라 여긴 직장동료이자 친구인 세라는 메기에게 중국에서의 취재를 맡기고 그래서 만나게 된 취재원은 요리사인 샘 량, 남자다.


    샘은 반은 유대인, 반은 중국인으로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할아버지는 노비 출신으로 중국 황실에서 서태후를 위해 일한 최후의 요리사들 중 한 명이고 아버지는 요리사의 피를 물려받았으나 중국에서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뒤로 요리와 중국에 등을 돌린다. 샘은 아버지의 뜻대로 자라서 교사가 되었으나 4년 전에 중국으로 와서 숙부들에게 요리를 배운 국가급 요리사다. 샘이 메기를 도와 친자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메기는 배에서 살았다. 남편이 죽은 후 집을 팔고 살림을 줄이고, 점점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럴 때마다 '슬픔도 한결 줄어드는 느낌'이어서 결국 작은 배를 거처로 삼고 '핸드폰 메시지 따위는 무시하고, 삶이 하나의 점처럼 졸아든 채'로 지냈다. 그러면서 '날마다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중'에 믿었던 남편의 배신과 마주치게 되고 중국으로 날아가서 샘을 만난다. 그다음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뻔하다. 남자가 만들어 준 요리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의 사촌들과 지내면서 '세상을 놓아버리고 잠 속으로 빠져들고' 그리고 샘을 사랑하게 된다.


  샘은 베이징 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열리는 요리경진대회에 북방요리 대표를 뽑는 경연에 나가야한다. 유대인인 어머니에게 '먹으면 힘이 되는 가정 요리'들을 배우는 것으로 요리의 길에 들어선 이후 중국에 와서 숙부들에게 중국 황실요리들을 전수받아 그 분야의 정상에 선  요리사다. 미국에서 자라고 교사로 일을 할 때나, 중국에서 요리사로 활동하면서도 언제나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던 그였다. 그런 샘에게 메기는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싶은 여자다. 혼자 먹게 놔두고 싶지 않으며, 가족들과의 연회에 데려가고 싶은 여자, 무엇을 먹는가에 관해서도 신경을 써 주고 싶은 여자다. 그녀가 그로 인해 수심을 떨쳐버리는 가에는 상관없다.


   어쩌면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로 끝날 수도 있는 이 소설이 내게 특별히 다가온 건 작가가 들려주는 중국과 중국요리에 관한 이야기가 메기와 샘의 만남을 신비와 따사로움으로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 중의 하나와 작가를 동일시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마련인데 '칸지의 부엌'은 그렇지 않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는 소설 속의 이야기와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 간격을 중국인과 중국요리에 관한 애정과 감탄으로 메운다. 마치 잘 꾸며진 무대장치 속에서 정답고 유쾌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즐거운 세계를 보는 것처럼 등장인물을 방해하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설명해주는 친절한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느낌으로 읽힌다.


    책 속에 또 다른 읽을거리로 등장하는 '마지막 중국 요리사'의 저자인 샘의 할아버지 량웨이는 황실의 요리사로 활약했으며 샘의 아버지인 량예는 황실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숙청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어두운 시절의 중국을 살아낸다. 그들과 함께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숙부라고 불리는 역시 뛰어난 요리사들의 이야기도 메기와 샘의 만남 곳곳에 섞여 들어가 맛깔스럽게 버무려진 요리처럼 감칠맛이 나는 글 읽기를 선물한다


    매일 주방에서 식재료를 다듬고, 불을 켜고 어떤 음식이라도 만든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칸지의 부엌'에 나오는 중국요리의 세계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그것들은 동시에 놀랄 만큼 노동집약적이다. '통통한 숙주나물 속을 철사로 파낸다음 돼지고기 소를 넣어 쪄낸 것', '섬세하고 투명한 만두피 안에 다진 야채로 소를 넣은 만두', '첫 입에는 파삭한데 먹어보면 안개처럼 부드러운 새우볶음', '간장과 밀단백으로만 만든 오리에 연근과 원추리 구근, 건두부, 생강 등에  암녹색 수초를 다져 섞은 소를 채워 넣고 구워  껍질이 진짜 오리처럼 바삭하고 윤이 나게 만든 오리구이' 등에 관한 묘사를 읽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그 요리들의 냄새가 풍겨나오는 것도 같고 조금만 더 집중하면 부드럽고 포근한 질감까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동파육 이야기는 또 어떤가. 고기는 부드럽고 촉촉하며, 지방은 가볍고 향긋한 커스터드 크림'같은 동파육은 시인 소동파의 조리법이라고 하는데 샘은 이 동파육을 응용해서 심사위원들을 위한 연회에 창작요리를 만든다. 그가 만든 요리의 지방은 '섬세하고 향긋해서 수풀레 같다'니 요리의 세계는 얼마나 깊을까? '음식을 포함한 삶의 모든 즐거움을 이데올로기적 죄악으로 여기게끔 만든 오랜 공포시대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중국인들이 이런 요리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건 '음식이라는 것이 몸을 위한 거지만 그건 그저  시작일뿐이고, 실은 마음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한 끼 식사는 리듬과 의미와 분위기까지 전하는 한 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칸지는 이야기의 종반부에 등장한다. 칸지는 '마치 사랑처럼 제일 간단하고 기본적인' 쌀로 만든 죽으로 '아삭아삭한 피클, 썰어놓은 푸른 채소, 깍둑 썬 두부, 바삭바삭한 훈제 어포, 땅콩, 수초 줄기, 잘근잘근 씹히는 불린 버섯, 성냥개비 모양으로 썰어놓은 짭짤한 원난햄 등 갖은 고명'을 취향대로 얹어 아침식사로 먹는다. 샘이 숙부들과 아버지, 메기를 위해 준비한 칸지는 숙부들의 표현을 빌면 '이런 죽이라면 저승에서라도 돌아올 만큼 완벽한 것'이었다. '음식의 진정한 완벽성은 놀랄 만큼 단순한 것'이고, '가장 질박한 요리가 가장 위대한 요리'라는 그들의 평소 지론과 딱 맞아 떨어진다. 상상만으로도 놀라운 이런 요리는 거의 모든 요리가 현재 중국 요리사들의 요리라고 한다. 그래도 주눅이 들거나  의기소침해지지는 않는다. 나는 평범한 주부이고 그들은 요리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국가급 요리사라 해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만든 요리는 '칸지' 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문학적인 요리의 도시 항저우의 루외루'에 가서  '커스터드 크림 같은 지방이 얹힌 동파육'을 맛보고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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