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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12. 2021

힐버리 부인

버지니아 울프

  

  내 뇌의 어딘가에는 먹는 것과 관련된 회로가 있을 것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관한 사고 체계가 자리 잡은 그곳은 뇌 안에서도 제일 바쁘고 어수선한 곳이다. 잠들기 전 아침메뉴를 정하고, 아침 먹으면서 점심과 저녁 메뉴를 이야기한다. 메뉴를 쉽게 정하는 날은 숙제를 일찍 마친 아이처럼 몸까지 가뿐한 것이 내가 얼마나 식사 준비를 어려워하는지를 감추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평소보다 외출이 줄어든 탓에 냉장고 속의 식자재들도 자연스레 어우러지지 못하고 중구난방이다. 소시지와 토마토소스를 넣은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먹기로 했던 어느날도 마찬가지였다. 막상 준비하려고 보니 소시지도 토마토소스도 마땅치 않았다. 소시지를 넣은 나폴리탄 대신 베이컨을 넣은 나폴리탄으로 메뉴를 바꿀 때까지는 그래도 별 문제가 없었다. 올리브 오일에 베이컨과 양파를 볶다가 토마토 홀 한 캔을 넣고 20분 넘게 끓였다. 점도가 느껴질 때까지 소스를 졸여 맛을 보다가 아차 싶었다. 집에 스파게티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냄비에 물은 펄펄 끓고 있는데 스파게티가 없다니, 나폴리탄인데 푸실리나 마카로니를 삶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봉지 바닥에 조금씩 남아있는 그것들도 세 사람이 먹을 분량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깊숙이 숨겨져 있던 탈리아탈레 봉지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국수라도 삶았어야 했을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식사 준비를 때마다 크건 작건 홍역을 치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힐버리 부인이 생각난다.


   [밤과 낮]을 처음 읽었을 때는 버지니아 울프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다시 썼을까 싶을 정도로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결이 다른 점이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자기만의 방]이나 [3기니]를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눈에 들어왔고 무엇보다 캐서린이 맞닥뜨린 두 개의 세계, 꿈과 현실, 말해지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밤과 낮의 간극을 오가는 걸 지켜보며 마음을 졸였다. 세 번째 읽기에서는 힐버리 부인에게 매혹당했다. 


   그녀는 '다른 별에서 살기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라면 훌륭하게 처리해 나갔을 천성이 이곳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기'에 종종 할 일을 잊고 허둥거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규칙과 이성의 영향 아래 놓이기를 원한다는 사실에 놀라기만 할 뿐 그녀 자신은 도무지 터득하지 못해 낭패를 당하지만 바보 천치는 아니라서 좌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는 나름의 자질도 갖고 있다. 힐버리 부인이 등장해서 그 자질을 발휘하는 장면마다 커다랗고 뚱뚱하고 따뜻한 요정이 떠오른다. 쥐를 마부로 만들고 호박을 마차로 만들어버리는 동화 속 요정이 600쪽이 넘는 장편 소설을 읽는 내내 내 곁에 있었던 건 그러나 우연이 아니었다. 


   소설이 결말에 이를 즈음 힐버리 부인이 마차를 몰고 런던 시내를 돌며 랠프와 윌리엄을 데려온다. 때마침 카산드라가 나타나고, 반지가 굴러가고, 힐버리 씨가 반지를 주워 들며 자신도 모르게 화가 풀려버리는 장면은 잘 짜인 악극 같아서 글자들도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 이전의 읽기에서 그 장면이 가진 리듬을 몸 속 어딘가에 저장했는지도 모르겠다. 힘을 들이지 않고 지팡이 끝만 살짝 움직여서 마차를 만드는 요정처럼 힐버리 부인은 손짓 하나로 흩어진 세계를 정돈하고 제자리를 잃은 인물들에게 적당한 의자를 찾아 줄 수 있었다. 소금 단지와 끓는 물로 어수선한 부엌을 가진 내게도 그런 손짓, 그런 지팡이가 있으면 좋겠다. 책을 덮고 온라인 서점에서 지팡이, 아니 셰익스피어를 주문했다(힐버리 부인은 셰익스피어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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