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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ug 28. 2024

집안의 천사

등대로, 위인들의 집

이제 그녀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홀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이제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생각하는 것, 아니 생각하는 것조차도 아니고, 그저 잠자코 있는 것, 혼자 있는 것, 모든 존재와 행위가, 팽창하고 번쩍이고 소리 내는 것들이 사라지고 줄어들어 거의 엄숙한 가운데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쐐기 모양을 한 어둠의 핵심,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되는 것, 그녀는 여전히 똑바로 앉은 채 뜨개질을 계속했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듯 착념을 떨쳐 버린 자아는 자유로워져서 그 어떤 기이한 모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중에서


   [등대로]의 램지부인은 오십이 넘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워 눈길을 끈다. 어린아이들과 손이 많이 가는 남편, 끝없이 찾아오는 손님들로 숨 쉴 틈이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힘들고 지친 시간들이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다가와서 이런저런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애쓴다. 가끔은 자신이 왜 그런 일을 도맡는지, 혹시 허영은 아닌지 의심한다. 삶이 덧없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램지 부인의 일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녀는 지쳐 있을 때가 많았는데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는 불편함도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를테면 온실 지붕을 수리하는데 50파운드가 필요하지만 남편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거나 남편의 새 책이 그리 탐탁지 않다는 걸 본인이 알아차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등  소소한 일상사를 숨기는 것, 아이들이 그걸 눈치챌까 불안한 나머지 거짓말을 한다든가 하는 따위였다. 그런 일들이 그녀에게서 차츰 생기를 빼앗고 기쁨을 앗아갔다. 코번트리 패트모어의 '집안의 천사'의 모델이 있다면 바로 램지부인일 것이다. 


  램지 부인은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죽었다울프는 부인의 죽음을 어이없을 정도로 짧게 언급한다. 마치 누구나 예견할 수 있었던, ‘있을 법한 일’이라서 아무런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매일 반복되는 가사와 육아에 지친 몸으로 심리적 중압감까지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이들은 동의할 것이다. 울프는 ‘지난날의 스케치’에서 어머니가 진이 빠져(worn out) 돌아가셨다고 썼다.  



램지부인의 모델이었던 줄리아 프린셉 스티븐(버지니아 울프의 어머니)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는 집집마다 천사가 있었다. 울프의 에세이 [위인들의 집]에서도 또 한 명의 ‘집안의 천사’를 만날 수 있다. 제인 칼라일(이하 제인)은 토마스 칼라일의 아내로 그들 부부가 살았던 체인로의 집은 수도가 설치되지 않아 물이 필요할 때마다 지하의 부엌에 있는 우물에서 손으로 펌프질을 해서 물을 날랐는데 목욕통은 3층에 있었다고 한다.

물도 전깃불도 가스난로도 없이 책과 석탄 연기와 사주식 침대와 마호가니 장식장으로 채워진 이 높고 낡은 집에서 당대 가장 까다롭고 신경이 예민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사람이 불운한 하녀 한 사람의 시중을 받으며 여러 해를 살았다. 빅토리아 중기 어쩔 수 없이 이 집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날이면 날마다 여주인과 하녀가 청결과 온기를 얻고자 먼지나 추위와 싸우는 전쟁터였다.
                                                      버지니아 울프,  [런던 산책] 중에서


  제인이 침대에 누워 기침을 하면서 의자 덮개와 응접실의 벽지에 관해 생각하는 동안 위층의 칼라일은 역사책을 썼다. 칼라일은 유명해졌고 제인은 남편의 추종자들을 위해 티파티를 주최하고 손님들을 접대했다. 칼라일의 책을 즐겨 읽던 제럴딘 주스베리 Geraldine Jewsbury가 1841년에 칼라일 부부를 만났을 때도 그들은 체인로에 여전히 살고 있었다. 제럴딘은 제인과 급속하게 친해졌고 그들은 제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똑똑했던 제럴딘은 제인에게 계속 묻는다. 헌 옷 수선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대신 왜 글을 쓰지 않는지. 더 나아가 “칼라일 씨에게 동정을 구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찬물을 끼얹게 하지도 마세요. 당신은 자신과 자신의 일을 존중해야 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럴딘은 용감하고 독립적이었으며 시적 상상력이 있었고 욕을 잘했다.  제인은 보다 직접적이고 실제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방에게서 보았으며 그것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들이 차츰 서로를 용인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의 관계는 넓어지고 단순해졌다. 제인이 칼라일이 싫어하는 일들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동안 제럴딘은 바닥에 누워서 여성들에게 힘을 휘두르는 남성들을 욕하고 발로 차고 싶어 했다. 제럴딘은 자신이 재능이 있다는 사실, 그러나 그 재능으로 많은 걸 할 수는 없을 것이란 사실을 모두 알았다.

우리 뒤에 오는 여자들이 있어요, 여성 본성의 위상에 점점 더 가까이 접근할 여자들이에요. 저는 제 자신을 그저 희미한 표시로, 여자들 속에 있는 어떤 더 높은 자질이나 가능성의 기초로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저지른 괴벽스러운 짓이나 실수, 불행, 터무니없는 일들은 어떤 불완전한 형성, 미숙한 성장의 결과일 뿐이에요.
                                          버지니아 울프, [이상한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 중에서


  칼라일 부인은 칼라일의 숭배자들을 위해 티파티를 준비하다가 삶을 마감했고, 욕을 잘했던 제럴딘은 몇 권의 소설을 남겼다. 칼라일 부부는 둘 다 재능이 있었고 서로 사랑했지만 벌레들과 끝없는 계단과 지하실의 펌프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만약 욕조, 냉온수, 침실의 난방 같은 현대식 편의 시설과 실내 위생 시설이 완비되었더라면 두 사람의 생활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집에 온수를 설치한 칼라일은 칼라일이 못 됐을 것이고, 박멸할 벌레가 없는 집의 제인은 우리가 아는 여성과 다른 사람이 됐을 것이다. 칼라일은 아내의 편지들을 편집하여 1883년에 <제인 웰시 칼라일의 편지와 기록 : 토머스 칼라일 엮음 Letters and Memorials of Jane Welsh Carlyle, Prepared for Publication by Thomas Carlyle〉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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