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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10. 2024

여자의 산책

  버지니아 울프가 마음대로 걷고 헤매며 산책을 즐길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가능했다. 레슬리가 죽고 난 후 스티븐가의 남매들은 하이드파크 게이트 22번지에서 나와 블룸즈버리의 고든 스퀘어 46번지로 이사했다. 당시에 블룸즈버리는 역사가 깊고 문학적인 동네이기는 했지만 더이상 예전의 부유한 동네는 아니었다. 버지니아와 바네사가 집을 구하던 때는 집값이 싸서 돈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시기였다. 단칸방이 많아서 젊은 직장여성들이 많이 살았다. 보조금을 받고 젊은 여성들을 지원하는 하숙집도 있었다고 한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했는데 버지니아 울프가 이사를 했을 때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행진을 하고 정치적인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모여들던 때였다. [밤과 낮]에서 메리가 살았던 방도 블룸즈버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사한 곳은 단칸방이 아니라 테라스가 딸린 오 층짜리 커다란 집이었다. 예전에 살던 곳과 달리 밝은 집이었는데 버지니아가 아파서 누워있는 사이에 언니인 바네사가 이사를 하고 집을 꾸몄다. 젊은이들이 이사한 곳을 살펴보러 방문한 친척들은 새 집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하이드파크 게이트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사는 그들이 속했던 세상과의 작별을 상징하는 듯한 사건이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 사실이 버지니아 울프가 작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글쓰기의 소재를 제공해 준건 산책이었고.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쓰는 일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남김없이 기록해야 한다는 게 중요했다.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라도 기록되는 순간 어떤 의미를 드러내기 마련이고, 그런 글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어느 날 우리 안에서 위대한 시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운이 좋았다. 산책은 새로 얻은 자유였다. 여자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도시를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던 건 비교적 부유한 남성들뿐이었다. 리베카 솔닛이 [걷기의 인문학]에서 "왜 여자들은 나와서 걸어 다니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로런 엘킨이 [도시를 걷는 여자들]의 서문에서 플라네리(산보)란 단어를 얘기하면서 플라뇌르(남성)란 단어는 있는데 플라뇌즈(여성)라는 단어가 없다는 걸 발견하고 믿을 수 없다고 말한 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도시를 돌아다니는 기쁨이 성별에 따라 다를 리가 없는데 말이다.  버지니아가 대영 박물관에서 여성들에 관해 제대로 쓰인 책들을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들에 관한 글을 찾기 어려웠던 것처럼, 산책하는 여성들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간혹 용감한 여성들이 있긴 했지만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었다.


  제인 오스틴은 어땠을까? [오만과 편견]의 자매들도 산책을 좋아했다. 무리 지어 메리턴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건 그들이 좋아하는 오락이었다. 어느 날 큰 딸인 제인이 빙리네 집에 갔다가 감기에 걸린다. 엘리자베스가 언니를 보러 혼자 걸어가겠다고 하자 엄마가 제정신이냐고 반대한다. 엘리자베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울타리를 넘고 물 웅덩이를 건넌다. 신발과 드레스 자락이 진흙투성이가 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엘리자베스가 빙리의 집에 도착했을 때 빙리의 누이들은 경악한다. 더러워진 드레스를 보고 놀란 게 아니라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먼 길을 혼자 걸어온 것에 대해서. 발목까지 진흙탕에 빠져 가며 혼자서 다니다니 대체 뭘 보여주고 싶은 거냐고, 정말 웃기지 않느냐고. 자기가 얼마나 독립적인지를 자랑하려는 수작이 아니냐며 비웃는다. 당시 중상류층 여성들은 사프롱 없이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는데 엘리자베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깨트려버린 것이었다. 빙리의 누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예법을 잣대로 삼아 엘리자베스를 깎아내리고.

                                                                                            

  19세기 여성들이 쓴 글을 보면 당시 부르주아 여성은 혼자 집 밖으로 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 평판이 손상되고 명예를 잃을 위험에 처했다. 거리에 나온 여자는 말 그대로 거리의 여자, 성매매 여성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비평가들은 말하지만 이런 자료들도 대체로 남자들이 작성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던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18세기, 물론 그 이전에도 평범한 여성의 생활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들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글 쓰는 법을 배웠는지, 자기만의 방이 있었는지, 21 살이 되기 전에 아이를 낳은 여자는 얼마나 되었는지, 간단히 말해 그들이 아침 여덟 시부터 밤 여덟 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오래전부터 여성들 스스로가 매일의 평범한 일상을 낱낱이 기록해 왔다면 적어도 19세기의 남성들이 여성에 관한 글을 쓸 때 참고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지 않았을 테고, 만약 그랬다면 [자기만의 방]의 화자가 읽을 보다 나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여성들이 쓴 여성에 관한 글도 찾을 수 있었을 테다. 물론 그중에는 홀로 산책하기를 좋아했던 여성들이 남긴 글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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