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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07. 2024

이야기의 힘

세월

  우리가 이야기 속에서 찾는 것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내 손에 담는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그리하여 ‘이 순간이 이해와 더불어 완전해지고 환해지고 깊어져서 빛날 때까지 채워 가는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세월]이 다른 이야기인 동시에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레슬리와 줄리아가 결혼한 건 1878년이고 버지니아울프는 1882년에 태어났다. 1937년에 출간된 [세월]의 첫 장은 <1880년>, 마지막 장은 <현재>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 <1880년>에서는 작가의 유년이 그대로 들여다 보인다. 엄마가 이층 침실에서 죽어가는 장면은 작가의 회고록 [지난날의 스케치]를 다시 읽는 것 같다. 엄마는 침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가족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기다린다. 엄마가 회복할 수 없다는 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건 ‘죽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다. 드디어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지나가도 ‘끝’은 아니다. 검은 상복과 관습적인 애도의 의식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1장은 장례식 장면에서 일단락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회고록을 읽은 이들은 쉽게 다음 장으로 건너갈 수 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회고록에서 어머니의 죽음이 빚어낸 비극은 단지 그들이 불행을 느끼게 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비현실적으로 만든 동시에 자신들이 침울해지고 남의 이목을 의식하게 된 것이라고 썼다. 마음에 없는 역할을 해야 했고 알지 못하는 말을 찾아 더듬거려야 했던 상황이 모든 것을 덮어 감추고 흐릿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깊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오래지 않아 자신들이 활기를 되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빠트리지 않았다. 당위적 모습과 실제 모습 간의 갈등이 이어졌다. 장례식에 왔던 오빠 토비는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이런 식으로 계속 지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을 남겼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의 매정한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가 옳다는 것을 알았다. [세월]의 많은 장면들은 버지니아 울프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지난 순간들에서 시작했고 그렇기에 장례식 장면에서 생략된 부분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건네진다.


    막내 로즈가 홀로 장난감 가게에 다녀왔던 어느 날의 사건은 역시 버지니아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아름다운 언니 스텔라의 많은 혼자들 중 한 명이 벌인 소동에서 유래한 에피소드다. 로즈가 가게로 달려가는 길에 만난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로즈 앞에서 옷의 단추를 연다. 로즈는 그날 밤에 잠을 못 이룬다. 언니가 왜 그러느냐 물어도 그 얘기를 할 수가 없다. 뭔가 수치스러운 감정이 드는데 그게 자기가 잘못한 탓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혼자 장난감 가게에 다녀온 일에 대해 본능적인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시대이기도 했지만 수치심은 설명할 수가 없었다. 훗날 버지니아울프는 여성 지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런 수치심에 관해, 성적 도발을 당했을 때 왜 여자가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지 의심하고 분개하는 어조로 묻곤 했다.


   로즈의 언니들 역시 집 주변의 거리만, 그것도 아침 8시 반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만 걸을 수 있었다. 집 주변을 벗어나 홀로 다닌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큰 딸 엘리너가 집 밖에서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빈민촌에서 자선활동을 할 때가 유일하다. 자선활동은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에게 권장되는 일이었지만 즐거움이나 기분전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면 밖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엘리너는 기꺼이 그 일을 떠맡는다. 버지니아의 엄마인 줄리아도 아픈 이들을 위한 자원봉사 명목으로 집을 자주 비웠다. 버지니아는 유년시절의 엄마를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일종의 보편적인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엄마와 단둘이 몇 분 넘게 있던 적이 있었는지 회고하는 장면에서 당시에 전형적이었던 엄마들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난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에도 줄리아와 비슷한 엄마가 나온다. 크리스마스 아침인데 엄마가 없다. 엄마는 이미 봉사활동을 나갔고 딸들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바구니에 담아 뒤따라간다. 물론 돌아왔을 때 자신들이 포기한 아침식사보다 더 성대한 크리스마스 식탁이 차려져 있기는 했지만 그건 동화 속의 낭만일 뿐 스티븐가의 아이들은 보상을 받지 못했다. [등대로]의 램지 부인도 역시 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내려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의 집에 간다. 엘리너나 램지 부인이 바구니를 들고 집 밖으로 나갈 때 혹시 다른 마음을 숨겨 놓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바구니를 덮은 보자기를 들춰 보고 싶은 충동은 나만 느끼는 걸까? 어쩌면 안주인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때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을까?


    버지니아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등산가로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레슬리는 1879년에 걷기 모임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모임 이름이 <일요일의 방랑자들>였다. “체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가출옥 허가증”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첫머리의 ‘체면’ 대신 ‘가족’ 혹은 ‘집’이란 단어를 넣었다면 여자들을 위한 모임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여자들이 집을, 가족을 감옥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당당하게 ‘체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었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가 나갈 때는 ‘자선활동’이라는 명목이 필요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엘리너나 램지 부인이 들고 있던 바구니는 버지니아 울프가 [런던 거리 쏘다니기]에서 핑곗거리로 생각했던 연필과 같은 것이리라.


    [세월]은 그동안 버지니아 울프가 썼던 글들을 모아 만든 종합 선물세트 같다. 독자는 커다란 상자에서 꺼낸 작은 블록 몇 개로 놀고 있는 아이다. [세월]은 시간, 죽음, 전쟁, 차별, 동성애, 페미니즘, 가족들로 촘촘하게 짠 태피스트리다. 독자는 한쪽 끝에 삐져나온 실의 끄트머리를 잡고 다른 쪽 끝에 닿을 때까지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따라가야 한다. 실은 여러 가닥이고 색이나 꼬임이 각각 다르지만 결국 하나로 모인다. 그 끝에 삶의 정수가, 그리고 삶을 더 환하게 비추어주는 죽음이 있다. 언제나처럼 죽음이 삶과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걸어간다.


  아침에 문을 열면 하루가, 세상이 우리를 기다린다. 심호흡과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문 안에서의 내가 문 밖에서 또  다른 내가 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여자들은 모두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꾼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어딘가에는 다른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끝없이 되뇌는 것, 어쩌면 지금 이곳은 과거에 우리가 꿈꿨던 저곳일 수도 있으니까. 책을 덮을 때마다 다른 세상에서 돌아오는 기분인 건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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