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지 벌써 며칠 째다. 지친 몸으로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지만 새벽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밤도 꿈도 사금파리처럼 흩어진다. 지난 새벽도 예외가 아니었다. 창밖의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달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설거지할 때 떠오르던 달이 내가 잠든 사이에 머리 위로 올라온 모양이다. 한 번 달아난 잠이 쉬이 올 것 같지 않아서 잠들기 전 엎어둔 책을 다시 들었다. 갈증이 났다. 한밤의 적막을 깨트리기도 뭣하고 귀찮기도 해서 물 생각을 떨치려 이리저리 몸을 뒤채다가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다.
주방에는 사방에서 들어온 달빛이 넘실거렸다. 싱크대 위에 내려앉은 창살의 그림자가 푸른빛으로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물 잔을 들고 유리문에 기대어 바깥을 내다본다. 내가 선 곳에서 달은 보이지 않지만 멀리 맞은편 산등성이까지 보일 정도로 훤하다. 마당에는 어둠을 밀어낸 달빛이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다. 빨랫줄 가득 널린 빨래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 세탁기가 고장 났지. 내일은, 아니 오늘은 고칠 수 있을까?
세탁기가 멈춘 건 며칠 전이다. 당일에 수리기사가 왔지만 교체해야 할 부품이 없다며 그냥 돌아갔다. 세탁기 안에서 물과 세제에 뒤섞여 몇 바퀴 돌다가 갇혀버린 수건들을 그대로 놔둔 채였다. 수리기사가 왔을 때 세탁기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걸 깜빡 잊은 자신을 탓하는 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더운 날씨에 세탁기 안에 갇혀있는 빨래를 생각할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부품을 가지고 다시 찾아온 수리기사에게 제일 먼저 세탁기 문 좀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빨래통에 미끈거리는 수건들을 담아 일단 밖으로 내놓았다. 수리기사는 이것저것 살피고 부픔을 교체했지만 이번에도 실패, 다시 오겠단다. 나는 그가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서 도대체 언제쯤 수리가 끝나게 될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찬 음료수 한 병을 건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빨래들은 손으로 꾹꾹 눌러 대충 물기를 짜낸 다음 소나무에 맨 빨랫줄에 걸었다. 비눗물에 적셔진 그대로였다. 세탁기야 며칠 새 고쳐질 것이고 수건들은 다시 빨면 그만이니까. 당장은 세탁기 안에서 갇혀있던 수건들을 끄집어낸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했다. 세탁기가 고쳐지기만 하면 저런 모습은 안 봐도 될 테니 조급해할 건 없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느낌은 사실 오래된 것이었다. 작은 톱니바퀴가 어긋난 기분이랄까, 입안에서 모래가 서걱거리고 눈앞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이는 날들이 계속되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세탁기가 멈추자 신기하게도 불안이 가라앉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에 시달리던 환자가 드디어 정확한 치료법을 찾은 격이었다. 세탁기만 고쳐지면 그동안 삐걱거렸던 삶이 다시 돌아갈 테니까. 흔들렸던 믿음이 굳건해지고 비틀렸던 일상이 제자리를 찾아갈 터였다. 조화롭고 균형 잡힌 나날들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달빛 아래 가볍게 흔들리는 빨래들의 검은 실루엣이 도심의 빌딩 위에서 빛나던 달과 겹쳐진다.
폭염이 예상되니 외출을 자제하라는 문자가 왔지만 오래전에 잡은 약속을 물릴 수가 없어서 그대로 나간 참이었다. 정오 무렵의 광화문 사거리는 열기와 함성으로 가득했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어려울 만큼 강한 햇살과 숨 막히는 열기에 더해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인 확성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구호와 행진곡들이 세종문화회관 앞 드넓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길을 막은 시위대와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뒤섞이고 방향을 잃은 외침들이 사방에서 화살처럼 날아왔다. 귀가 먹먹하고 온몸이 따가웠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도망치듯 지하로 숨어들었다. 전철역과 연결된 지하보도는 축축하고 어두침침해서 평소 같으면 잘 이용하지 않지만 그날은 조용하고 서늘한 게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약속장소가 있는 건물까지 곧장 이어져 더 이상 뜨거운 햇살과 귀를 찢는 소음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모임 중에 밖의 상황이 궁금하긴 했지만 당장의 더위와 혼잡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여 집에 갈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시위 때문에 전철이 광화문역을 그대로 통과했다는 사실을 늦게 도착한 이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모임은 끝났지만 집에 갈 일이 남았다. 그동안 해가 기울어 거리는 조금 차분해진 것처럼 보였으나 시위대는 아직 도로 행진 중이었고 지나가는 노선버스들도 볼 수 없었다. 전철 역시 여전히 무정차통과였다. 을지로입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곳이라면 우리 동네까지 한 번에 가는 광역버스를 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근처에 전철역도 있으니까 광화문보다는 수월하게 집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목을 접어 돌아가며 한참을 걷다가 광교 근처에서 큰길로 나왔다. 시위대는 여전히 행진 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몇몇은 간간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박수도 쳤지만 대부분은 땀에 젖어 후줄근해진 매무새와 무거운 발걸음으로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그들이 패잔병처럼 지치고 시든 기색이라는 점이 낯설었다. 하필 시위대의 행진방향과 내가 버스를 타러 가는 곳이 같은 방향이라는 우연으로 그들의 지친 모습을 목격하게 된 것이 불편하고 민망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삼복염천에 열기로 가득한 도심 한복판에 모여들어 외치게 하는 것일까. 집에 갈 걱정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던 내가 그들에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지만 그곳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정류장에 앉아 기다리던 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어딘가를 향해 가버렸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던 젊은 여자가 지친 표정으로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엄마가 아이의 얼굴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고 어깨를 감싸듯 토닥이며 전철을 타러 가자고 말하는 게 들렸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되니까 하면서 아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둘은 손을 잡고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걸어 전철역으로 향했다. 나 역시 아이가 된 것처럼 그들의 뒤를 따랐다. 평소 같았으면 오가는 차들로 붐볐을 도로가 텅 빈 모습은 낯설었다. 시위차량에서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거듭 들려왔지만 미리 녹음된 목소리는 침묵만 더할 뿐이었다. 지친 모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아이에게 이 날이 어떻게 기억될까 상상했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곳에 대한 근심이 더해진다. 시위대가 흔들던 깃발, 그들이 불렀던 노래, 그들이 외쳤던 구호, 그들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더위에 지친 젊은 엄마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말하는 이는 점점 더 많아지는데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이 소란한 시대는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서울 한복판에서 휘영청 밝은 달을 맞닥뜨린 건 그런 생각들로 혼란스러운 머리를 흔들다가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고개를 젖히는 순간 아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밝은 달이 보였다. 종일 더위에 찌든 몸이 서늘해졌다. 이 어두운 시대, 이 밤 같은 시대의 하늘에도 달은 변함없이 떠올라 도시를 비추었다. 그토록 맑은 달빛 아래 무엇을 숨길 수 있을까. 힘을 준 눈에 물기가 어렸다. 달은 이 모든 걸 보고 있었던 것이다.
고장 난 세탁기에서 풀려난 빨래들이 달빛 아래 만장처럼 흔들렸다. 세제를 뒤집어쓴 채로 꾸덕꾸덕 말라가는 그것들이 시위대가 들고 있던 깃발처럼 공허했다. 세탁기를 고치는 일처럼 어긋나고 삐걱거리는 우리 사회를 고치는 일도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마당에 널린 빨래를 보고 있는 달은 며칠 전의 시위대도, 지친 엄마에게 손을 잡힌 채 영문을 모르고 끌려가던 여자아이도 고스란히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단잠을 이루지 못하고 토막 난 꿈을 꾸는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제목 <달빛에도 부끄러워>는 신경림 시인의 <달빛>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