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바람을 타거나 일으키거나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 있다. - 니체 -

by 청연
6장. 바람을 타거나 일으키거나
- 한식은 한류를 타고
- 오빠 부대가 떴다!
- 시행착오, 실수가 성장동력
- [2014. 2월 일기] 카자흐스탄이 심상치 않다
- [2014. 5월 일기] 여기, 함께 만들어 가는 꿈
- 일상의 쉼표, '아바이'공원


한식은 한류를 타고


단조롭던 도시에 불기 시작한 작고 새로운 바람

크리스마스에 개업한 이후 우리 카페를 찾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진짜 한국인이 만들어 내는 '오리지널' 한식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만큼이나 개업을 기다렸던 사람들도 있었고, 한국 사랑에 푹 빠진 자녀들의 애원에 마지못해 방문하는 어른들도 많았다.


가끔 지역 가수나 연예인도 방문했다. 특히 학생들이 많이 찾아주었는데, 인근 일반 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에게 가까이 있어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잠시 들려 시간을 보낼만한 새로운 ‘아지트’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반갑고 감동을 주는 손님은 도시 외곽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달려오는 학생들이었다.


여기가 새로 연 한국 카페 맞죠?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카페에 들어서는 천진난만한 학생들은 마치 축제장같이 분위기를 ‘업’시켰다.


찍고 먹고 찍고 마시고

SNS가 이제 막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는 때라 카페에 들어선 사람들은 일단 사진부터 찍었다. 찍고 먹고 또 찍고 마시고. 그리고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찍고. 그리고 포스팅하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도 행복했다. 가끔 사진을 같이 찍자고 요청하는 손님들 때문에, 주방 튀김 실에서 불려 나오기도 했다.


아, 나 지금 상태가 엉망인데...


한류, 문화 충격

한국 드라마 주몽 알죠? 너무 좋아해요!


알고 보니 이곳에 ‘원조 한류’가 있었다. 장년층 이상은 한국 사극 드라마 주몽, 대장금, 그리고 선남선녀 배우가 출연했던 이병헌, 송혜교 주연의 ‘올인’을 너무도 좋아했다. 특히 중년 여성들은 ‘올인’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다. 아직 카자흐스탄은 미디어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자체 제작 영화나 드라마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주로 러시아나 인도에서 수입한 영화나 드라마를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주었는데, 어찌나 무한반복으로 재방송하는지 현지인들은 배우의 다음 대사를 미리 말할 정도였다.


한국 드라마는 이들에게 거의 문화 충격이었다. 탄탄한 시놉시스에 조각 같은 미남, 미녀가 열연하는 한국 드라마는 가히 드라마의 '신세계'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사건 전개가 빠르고, 반전이 많아 예측할 수 없는 '다음 회'에 대한 기대감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했다.


드라마 '올인 All in'에 빵 터지다

특히 드라마 '올인'은 러시아어로 '바 반크 Ва банк'라는 제목으로 방영이 되었는데, 여기에 우리가 박장대소한 에피소드가 있다.


바 반크 알죠? 바 반크!


직원들이 한국 드라마 "바 반크 알죠? 바 반크!"라고 했을 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질 못했다.

'빠방 빠방?'

딱 이렇게 들렸는데 그런 이상한 제목의 드라마가 있을 리 없었다. 제목을 잘 못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보, 한국 드라마 중에 빠방? 바방크? 이런 제목이 있었나?"

"글쎄, 금시초문인데요?"

아내도 이 총 쏘는 소리 같은 우스꽝스럽고 아리송한 드라마 제목을 알 턱이 없었다.


알고 보니 'Ва банк'는 러시아어 겜블링 용어로 '올인 All in'이란 뜻이었다!

그 뜻을 알고 나서 얼마나 웃었는지...


너, 빠방 알지? 한국 드라마!


K-POP에 열광하는 'Young man' 들

최근 들어 젊은 층에는 한류의 바람이 더욱더 거세게 불고 있다. 특히 K-POP의 열기가 뜨겁다. 그룹 EXO 가장 인기가 많고 얼마 전 데뷔한 그룹 BTS가 뒤를 이었다. 사실 한국 아이돌 그룹 EXO나 BTS는 현지 학생들이 매장에 한국 아이돌 음악을 좀 틀어 달라고 해서 알게 됐다.


내 나이 서른 중반. 사실 그런 최신식 아이돌 그룹(?)에 큰 관심이 없을 나이다. 나는 편안한 음악이나 감성적인 발라드 음악이 좋은데, 아쉽게도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을 아는 친구들은 하나도 없었다.

BTS 너무 좋아요. 아시죠? BTS? BTS 음악 좀 틀어주세요!


한 여학생이 BTS를 너무 좋아한다며 매장에 그 음악을 틀어달라고 부탁했는데, BTS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한 마디에 BTS가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기억력이 썩 좋지 않은 나도 딱 한 번 듣고도 그 그룹명을 바로 기억할 수 있었다.


미안한데, 아... BTS가 누구죠?
노래 제목이 뭐죠?


사실 나는 그때 BTS를 몰랐었다.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학생은 다그치듯 나에게 BTS의 한국 이름을 불러줬다.


BTS! 방. 탕. 소. 년. 단!


그 학생은 분명 ‘방탕’이라고 했다. 방탕이라니... 순간 그룹 이름을 왜 '방탕 소년단'이라고 했을까 궁금했다. 그룹명을 딱 듣는 순간 떠오르는 이미지가 영 별로였기 때문이었다. 손님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달라고 조르니 마지못해 가수를 검색하다 실소가 터졌다. 동영상 검색창에 '방탕'이라고 적었더니, 자동완성 기능이 즉시 '방탄소년단'이라는 추천어를 띄웠기 때문이다.


방탕이 아니고 '방탄 Bulletproof'이네!
그럼 그렇지, 방탕일 리 없지...


그렇게 제대로 된 'BTS - 방탄소년단'을 알게 됐고, 수십 번을 들어도 다시 틀어달라고 졸라대는 학생들 덕에 나도 후렴 정도는 따라 부를 수준이 되었다. 한국어 회화 잘 못 해도 노래 한두 곡은 랩 부분까지 몽땅 외워서 따라 부르는 학생들이 신기하고 대단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슈퍼 아이돌 그룹들 덕택에, 한식을 메인 아이템으로 하는 우리 카페도 순풍을 타고 있다. 한국 사랑. 한류 사랑. 그 바람에 편승한 한식도 같이 유행을 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거친 중앙아시아 대륙에도 한류의 바람이 불고 있다.

K-POP은 ‘중앙아시아의 거인’도 춤추게 했다!




"주몽 알죠?"

"대장금 알죠?"

"바 반크! 아시죠?"


중앙아시아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꼭 한 번쯤은 듣게 되는 질문이다.


한류는 최고의 '아이스 브레이커 Icebreaker'다.


장난기 많은 단골인 카자흐스탄 가수(우), 필자(좌)

유명인, 인플루 엔서가 다녀가면서 매장 홍보와 마케팅에 도움이 많이 됐다.




오빠 부대가 떴다!

좀 웃긴 얘기지만 연예인도 유명인도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는 꽤 많은 수의 ‘오빠부대’가 있다. 사실 특별히 인기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카페를 방문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내 이름이 ‘오빠’ 이기 때문이다.


"저... 이름이 뭐예요?"


한국어 배우기에 열성적인 학생들은 한국어를 한 마디씩 연습해 와서 진짜 한국인과 대화해보기를 도전했다. 물론 언제든지 나는 그런 도전을 환영했다. 내 이름을 알려주고 가끔은 그들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주기도 했다. 참 별것 아닌 것에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내 한국 이름을 몇 번, 아니 수십 번 이상을 알려줬지만, 현지인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이름이라 잘 기억하지 못했다. 나 또한 그들의 이름을 단번에 기억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오빠라 불러요.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우니 그냥 오빠라고 했는데, 어느새 그게 나의 현지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여기에서 내 이름은 오빠가 되었다.


그런데 이 상큼한(?) 이름을 정겹게 불러줄 때 정말 어색한 두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아주 어린 꼬마 손님이 나를 오빠라 부르는 경우였다. 딸 같은 아이들이 오빠라 부르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한날 나를 오빠라 부르는 한 아이를 본 큰딸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아빠, 왜 저 아이는 아빠를 오빠라고 불러요?
음... 딸, 그건...
그냥 너도 이제 아빠를 오빠라 불러! 알았지?


반대로 좀 당혹스러울 때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빠라 부를 때였다. 주방에서 가장 나이 많은 여직원은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데 그도 나를 오빠라 부른다. 그는 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 조금 어색했을 때는 "저기..." 하며 내 옷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며 나를 부르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오빠! 오빠! 여기 좀 봐주세요"라며 나를 불러서 깜짝 놀랐다. 일찍 결혼한 그는 벌써 이십 대가 된 아들이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좀 부담스러웠다. 사실 많이 부담스러웠다!

카자흐 미녀 오빠부대


부르면 꽃이 되어주리

호칭은 참 중요한 것 같다. 처음에는 그들이 그저 내 이름으로 부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들을 때마다 더 친근해지는 느낌이었다. 직원들이나 방문하는 학생들이 오빠의 한국적 의미를 알게 된 이후로는 오히려 더 친근하게 불러주었다. 정말 친오빠 부르듯이.


우리 카페를 방문하고 수줍게 오빠라 불러주었던 친구들에게 그 감사의 화답으로 그들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주었다. 처음에는 손에 잡히는 아무 종이나 냅킨 또는 그들 손에 쥐어진 노트에다 적어 주고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라며 덕담을 덧붙여 주었다. 가볍게 시작한 일인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그들은 자신의 한글 이름과 한국어가 적힌 메모지나 노트를 들고 사진을 찍고 SNS에 자랑으로 올렸다.

좋아들 해주니, 조금 더 나아가 볼까?


그래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 카페 방문자를 위한 한국 이미지를 더한 캘리그래피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료할 때나 아무 생각이 없을 때 아무 곳에나 글을 쓰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손 글시 체가 아주 예쁘고 멋있진 않아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몇 가지 필체를 가지고 있다. 글자 쓰는 것 자체에 관심이 있어 멋있거나 예쁘게 글자를 쓰는 사람의 필체를 흉내 내보기도 했는데 그게 어느새 익숙한 내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노력으로 얻은,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아내는 결혼 전에 내 외모는 전혀~이상형이 아닌데, 손 글씨는 무척 마음에 든다고 했었다. ‘손 글씨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나타난다’면서. 어쩌면 글씨체도 내 결혼에 한몫 보탠 셈이다.) 캘리그래피를 배워 본 적은 없지만 뭐 정성 들여 쓰면 되지 별것이 있나 싶었다. 원래 무지가 사람을 용감하게 하는 법이다.


원하는 손님 누구에게나 캘리그래피를!


캘리그래피를 요청하는 손님은 그 이름을 적어 즉석에서 만들어 주었고, 잠깐 쉴 때나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할 때는 한두 장씩 그려두고 이벤트성으로 손님들에게 무작위로 나누어 주었다. 어떤 이들은 갑자기 내밀어지는 작은 깜짝 선물에 기쁨으로 반응해 주었다. 사실 선물 받아서 기분 나쁜 사람은 없을 터 비록 수준 있는 캘리그래피는 아니어도 그저 한글과 한국 이미지가 담겨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받았다. 나름 ‘창작’이라는 부담은 있었지만, 캘리그래피를 받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의 미소 띤 얼굴을 보는 것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가끔 먼저 선물 받은 친구의 얘기를 듣고 찾아와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사람도 생겼는데, 그들 중 몇몇은 아주 구체적으로 주문을 하곤 했다.


"오빠, 제 이름 그리고 EXO를 꼭 넣어주세요!"

"아, 네, 네~."


초기에 만든 캘리그래피

초기 작품들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끄럽다.

그러나 그때가 있었기에 더 나아진 지금이 있다.


잘해서 하는 게 아니었다. 하다 보니 나아졌다.

평범한 일반인에겐 타고난 재능보다는 부단한 노력이 더 큰 자산이다.


꿈꾸는 그 무엇이든 일단 해봐야 한다.

해보면 안다.




시행착오, 실수가 성장동력


정성스럽게 준비한 '진짜' 한국식 음식이 잘 통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몇 가지 한식 메뉴는 재료와 맛의 수정이 필요했다. 이런 현지 문화와 상황에 맞는 현지화 전략은 해외에서 한식 창업을 계획 중이라면 꼭 고려해 보아야 할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참기름, 향이 진할수록 더 어려워

김밥은 현지인들에게 한식보다 먼저 정착한 일본 음식 초밥의 한 종류쯤으로 여겨진다. 이곳에도 몇 곳에 일식 레스토랑이 있지만 제법 비싼 편이라 일반 시민들이 자주 즐기기에는 부담스러운 곳이다. 그런 현지인들이 우리 카페에서 김밥을 주문하면 첫 번째 놀라는 게 '푸짐한 양'이었다. 한 줄을 가지런히 통째로 잘라 가득 담겨 나오는 김밥을 보면 일단 양적으로는 만족해했다.


그다음 놀라는 게 그 맛이었는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떠난 자리에 남기고 간 음식을 늘 살펴보면 대부분 접시만 남는데 유독 김밥만 남아있는 경우가 잦았다.

뭐가 문젤까?


한 날은 직접 손님께 물어보니 '향'이 너무 독특해서 좀 먹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아주 진한 참기름이 문제였다. 우리는 맛있는 김밥을 만든다고 시골 부모님께 부탁해서 직접 수확하고 짜서 보내주신 귀한 참기름을 듬뿍 발라 김밥을 만들었다. 물론 손님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참기를 경험이 없는 대다수의 현지인에게는 이 고소한 참기름 향이 너무도 이상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 생각에는 향이 아주 진하고 특이한 고수 나물은 잘도 먹으면서 참기름 향을 이해 못 하는 게 이상하지만, 참기름은 이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너무 새로운 것이었다. 결국 향을 조금 낮추고 조금 가벼운 느낌의 '특별 제조 참기름'을 발랐더니 역시 기대대로 접시만 남았다.


'순한 맛'조차 맵다

정말 놀란 건 현지인들이 매운맛에 너무도 민감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메뉴 중에는 순한 라면과 매운 라면 두 종류가 있는데, 순한 라면은 '오뚜X'사에서 생산되는 '순한 맛 Z라면'을 사용했다. 매울수록 더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으로는 이렇게 순한 라면을 손님들이 좋아할까 싶었는데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의외로 순한 맛도 맵다는 손님들이 많았다. 심하다 싶었지만 이게 이들의 또 다른 식성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보다 더 순하게 만들 수 있지?


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이 거듭되었고 끝내 생각해낸 게 치즈를 넣는 것이었다.

어떻게 됐을까?

치즈를 넣은 순한 맛 라면이 그 후에는 베스트 메뉴가 됐다. 물론 사람들은 점점 매운맛에 길들어 갔고 시간은 꽤 걸렸지만 매운맛의 매력을 찾는 이가 조금씩 늘어갔다.


한날 젊은 남자들이 단체로 와서 하나같이 매운맛 라면을 주문했다. 조금 걱정이 돼 생각보다 매울 거라고 조언해 주어도 듣지 않았다.

"남자는 매운 걸 먹어야지요!"

"아... 그렇지요!"

결국 그 친구들은 절반도 못 먹고 콜라만 잔뜩 마시고는 울면서 갔다.


미역? 근본을 모른다

미역국은 맛있고 건강한 음식이지만 바다 같은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에겐 '근본을 알 수 없는 음식'이다. 미역국을 시켜놓고서는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한 참 동안 들여다보는 사람, 한입 맛보고선 내려놓는 사람 등 처음 미역국을 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미역에 대한 경험도 건강정보도 없는 이들이 미역 맛을 이해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참 좋은 건데... 설명할 방법이...


결국 미역에 대한 '건강과 영양 정보지'를 만들어 모든 테이블에 올려두고서야 문제가 해결됐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 '산모에게 좋은 음식 - 미역'이 소문이 났고 이따금 임산부와 산모들이 아예 빈 냄비를 들고 와서 가득 담아 가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한식은 무엇이며, 어떻게 즐길 것인가?’ 교육 / 홍보물 제작 자료

한식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현지인들에게는 홍보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정보제공과 학습도 필요하다.


떡볶이, 그 맛은 매운 본드?

한 번은 한국 드라마에서 떡볶이를 맛있게 먹는 장면이 나왔는데 다음날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갈무리한 드라마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거 주세요!" 하며 다급하게 떡볶이를 주문했다.


그런데 막상 새빨간 떡볶이를 보고선 살짝 겁을 먹었는지 누구든 먼저 먹기를 주저했다. 나는 그들의 반응과 평가가 궁금해서 조금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가 먼저 먹어볼래?"

나름 순서를 정했고 그중 용감한(?) 선구자가 한 입 베어 물었는데 그 표정이 참으로 오묘했다. 일단 손으로 입에 부채질하는 것 보니 매워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말없이 다른 친구들을 보았고 그 맛을 궁금해하던 다른 사람들도 조심스럽게 하나씩 맛을 보았다. 그들은 처음 맛본 그 귀한 떡볶이를 거의 다 남겼다.

"맛이 어땠어요?"

자리를 일어서는 그들에게 맛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는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쫄깃쫄깃한 식감을 그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아... (식감이) 슈퍼 클레이(본드-접착제)를 씹는 것 같았어요!
...




[2014년 2월 일기]


카자흐스탄 상황이 심상치 않다


2014년 2월.

러시아와 미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대립하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불꽃이 튀고 있다. 러시아의 루블화가 폭락했고, 카자흐스탄 텡게화도 덩달아 달러 대비 25% 가까이 폭락했다. 현지인들은 '러시아가 기침하면 카자흐스탄은 폐렴에 걸린다'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러시아의 상황이 카자흐스탄에 사는 나에게 영향을 미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카자흐스탄 경제 흐름을 잘 알고 있고 국제관계에 박식한 싸샤도 예상하지 못했던 환율 폭락과 경기침체에 당황해했다.


문제는 이런 환율 변동을 예상하지 못하고 초기 빠른 시장 진입과 정착, 한식의 보급을 위해 전략적으로 음식의 가격을 낮게 책정한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한식의 '문'을 낮추고자 했던 우리에게는 더 큰 타격 일수밖에 없다. 요식업은 가격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니 함부로 가격을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수입 원재료 값은 계속 오르고 있고 위축된 소비 심리에 카페를 찾는 손님이 줄어드니 영업이익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환율이 다시 이전처럼 회복되지 못하더라도 이 정도 선에서라도 추가 하락 없이 끝났으면 좋겠다.


상황은 불안하지만 두 번째 매장을 열기 위해 더 속도를 냈다.

이미 주요 물자들을 한국에서 실어 왔기 때문에, 여기서 포기한다면 수천만 원이 단번에 증발해 버린다.


자칫 잘못하면 현재와 미래를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일단 싸샤와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최대한 빨리 두 번째 카페를 개업하기로 했다. 다수의 매장을 운영해서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것밖에는 달리 돌파구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2014년 5월 일기]


여기, 함께 만들어 가는 꿈


두 번째 카페도 이제 개업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사실 첫 번째 카페는 두 번째를 위한 예행연습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이 이제 실제적인 본 점 역할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매장의 규모도 첫 번째 매장의 두 배 가까이 됐다. 그동안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인테리어나 엑스테리어도 더 신경 써서 준비했고, 그만큼 투자된 비용이 많았고 준비 시간도 길었다.


무엇보다 최초 구상부터 주방, 인테리어, 엑스테리어 그리고 메뉴판까지 모두 파트너와 아내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의 공동 작품이라 더 애착이 갔다. 나는 생전 해본 적도 없는 초크아트로 홍보물들을 만들어냈고 아내는 카페 벽에다 직접 그림을 그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는 곳, 그야말로 우리의 '혼'과 '땀'이 녹아 담긴 곳이었다. 마침내 우리의 꿈이 정확히 실현된 곳이다.


2015년 5월.

드디어 두 번째 카페가 오픈되었다. 화질 좋은 한국산 빔프로젝터로 넓은 벽면에 고화질 영상을 비춘 것과 넓은 창가에 앉아서 창밖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은 이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최근 한국에서 고급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유행하는 대형 목재 파라솔까지 실내에 설치하고 나니 처음 목표했던 '한국 풍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아름답게 완성된 매장은 곧 심켄트에서 명소가 되었다. 다만, 매장 외부는 법적 제한이 많아 상대적으로 실내 인테리어에 치중할 수밖에 없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현지 직원 15명.

오늘까지 첫 번째, 두 번째 카페에 직원으로 선발된 직원이 벌써 15명을 넘어섰다. 식구가 많이 늘고 있고 늘어가는 직원의 수만큼 우리 사업도 성장하고 있다. 한편으론 이 많은 식구에게 좋은 직장을 만들어 주어야 할 우리의 책임도 무거워지고 있다.


싸샤는 카자흐 민족은 '정착하길 거부하는 유목민'의 피가 흐른다고 했었다. 자존심과 고집이 세서 아마 직원들이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이직도 쉽게 할 것이니 그들이 우리와 함께 오래 일할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직원들은 좀 달랐다. 자진 이직률이 높다는 편견을 깨듯 이곳에 더 오래 머물려고 했다. 쉬는 날에도 식당에 나와 다른 직원들과 수다로 시간을 보내는 직원, 사비로 쿠키나 케이크를 사 들고 와서 우리에게 함께 나누기를 권하는 직원도 있었다.


"모처럼 휴일인데, 왜 집에서 쉬거나 친구들 만나지 않고?"

"여기서 쉬는 게 더 좋아요!"


집보다 더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니 말릴 방법도 없다. 심지어 한 여직원의 자녀들은 매일같이 카페로 출근했다. 엄마가 일하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는 탓이다. 손님이 잘 앉지 않는 자리에 남매가 같이 앉아 영업에 방해될라 조용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참 기특했다. 퇴근 시간에 맞추어 가게 앞을 서성거리며 여자 친구를 기다리던 사내는 가끔은 매장 안으로 들어와 '주먹 인사'를 나누고 마감을 돕기도 했다. 이런 사람 '살' 냄새나는 풍경들이 직원들과 우리가 함께 카페를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들이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식구들.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였지만 이곳에서 함께 또 각자의 꿈을 그려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꿈을 공유했던 소중한 식구들
친구를 얻고자 하면, 함께 길을 떠나라! - 카자흐스탄 속담 -

우리는 함께 길을 걸으면서 친구가 되었다.

꿈을 공유한 15명의 친구, 이 험한 길이 외롭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일상의 쉼표, ‘아바이’ 공원


폭락한 환율과 침체한 경제 상황은 여전했지만 우리 카페에 많은 손님이 찾아주니 참 다행이었다. 성공을 말하기는 이르지만, 아직은 꿈꾸던 일을 해냈고 또 할 수 있다는 기쁨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매우 바쁨!


여전히 우리 일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다만, 두 번째 카페를 개업한 이후로는 그동안 외부 업무와 공사로 바빴던 파트너가 운영을 맞아 주고 있다. 그 덕에 가끔 '쉼'이라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조금씩 여유가 생겨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렸다. 두 번째 카페를 열기까지는 아내와 밤낮으로 쫓아다니다 보니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불쌍하게도 반년 이상을 집에만 묶여있던 아이들이었다. 다행히 장모님이 같이 놀아주시고 돌봐주셔서 아이들은 지루할 틈 없이 잘 지내왔다.


간혹 집에 일찍 들어갈 때면 아이들이 앞마당에 나와서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쫓아다니는 모습에 배꼽 웃음이 터졌다. 막대기 들고 쫓아다니며 놀았던 30년 전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모습은 2009년, 2012년생 한국 아이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게 참 흐뭇하고 보기 좋았다.


몽둥이를 장난감 삼아 노는 아이들


오늘도 아바이 빠르크(공원)로 간다

집에만 있어 답답할 아이들을 데리고 나서면 늘 그 길의 끝은 공원이었다. 그런데 그 공원의 이름이 참 친근하고 재미있다.


아바이 공원.


처음에는 '아버지'를 뜻하는 사투리 '아바이'와 같은 뜻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이 아바이는 그 아바이가 아니었다. 카자흐어 'Абай 아바이'는 '신중한'이란 뜻이다. 이 아바이 공원은 '아바이'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 출신의 유명한 시인이자 작곡가, 철학자를 기념해서 조성했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카자흐스탄 곳곳에 '아바이' 기념 동 상이 많았다.


아바이 공원, 아바이 기념 동상

특별히 이 공원을 자주 찾은 이유는 이 공원이 좋아서라기 보단, ‘특별히 걸을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폭이 좁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도 복이라면 복이다.


공원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 공원을 소리 지르며 쫓아다녔다.

아이들은 환경과 관계없이 늘 저렇게 즐겁다. 낡은 것이든 새것이든, 맑은 날이든 비 오는 날이든, 아빠 엄마가 곁에 있기만 하다면 그들은 늘 즐거웠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단연 최고의 것은 ‘함께’하는 것이다.

깔깔대며 마음껏 뛰어노는 것을 보는 것이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것이듯.


함께인 오늘,

우리는 아주 작지만 최고의 것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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