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코드 코리아 Chord Korea'로 통하라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 있다. - 니체 -

by 청연
7장. '코드 코리아 Chord Korea'로 통通하라!
- 고려인, 그 '희망의 씨앗'
- 기대만발 첫 한글 수업
- 선상님은 고정 '주연'
- 한 번쯤은 그 누군가의 꽃이 되어
- '우리'라는 작은 존재의 울림


고려인, 그 ‘희망의 씨앗’

꽃보다 할매

심켄트 제일 장로교회는 심켄트에서 가장 오래된 한인교회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교회는 영혼의 쉼을 주는 안식처이자 한국이라는 목마름을 달래는 약이었다. 현지 한인교회라는 특성상 출석 교인들은 몇 명의 카자흐인과 러시아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고려인이었다. 특히 교회 성가대 대원 대부분이 연세가 많으신 여성 고려인이셨는데, 교회의 ‘아이콘’ 같은 분들이셨다.


특유의 알록달록한 옷차림과 하나같이 몽실몽실한 헤어스타일, 눈 화장을 짙게 하셔서 오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눈. 사랑스러운 우리 성가대 할머니들의 모습이다. ‘꽃보다 할매’ 같은 느낌? 딱 그 느낌이다. 그리고 영혼의 깊은 울림이 있는 긴 비브라토를 특징으로 하는 성가 합창은 늘 미소를 짓게 했다. 이렇게 표현하긴 좀 송구하지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재미있게도 고려인 할머니나 중년 이상이신 분들은 하나 같이 눈가에 짙고 넓게 검은색으로 ‘스모키’ 화장이나 영구 문신을 하셨다. 얼마나 눈이 작고 찢어진 인종이라고 차별과 놀림을 받았던지, 눈이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위장’을 하신 셈이다. 과장되게 한 진한 눈 화장에 설움의 아픔이 묻어있는 것이다.


씨앗, 새 봄을 꿈꾸는 작은 희망

가끔 낯선 땅에 매몰차게 던져졌던 그분들의 생존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특히 토굴을 파고 추위를 피했던 사연을 들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살짝 젖었다. 이런 흥미롭고 애잔한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예배를 마친 후 이어지는 교제와 나눔의 시간이었다. 이분들은 북한말 같은 독특한 사투리를 쓰시는데, 그나마도 한국말을 많이 잊어버리셔서 긴 시간 얘기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왠지 조각조각 들리는 말씀이 왠지 마음에 더 와 닿았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한국인들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를 종착지로, 기차가 지나는 길 아무 곳에나 내 던져졌다. 여기 80세 이상이신 분은 그때에는 어린아이였고, 가축이나 수송하는 기차에 실려 이곳까지 오신 강제 이주된 1세대였다. 강제이주 1세대, 2세대인 분들이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혹독한 삶을 견디고 버티신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은 정말 '별것 아닌 자잘한 것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던 그때, 곡식 씨앗 한 줌을 챙겼지요...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가장 가슴 뜨거웠던 얘기는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도 알려주지도 않고 기타에 태울 때 혹시 몰라 한 줌씩 챙겨 든 '곡식 씨앗' 이야기였다. 그 작은 한 줌의 '희망 씨앗'으로 이듬해 일구기 시작한 게 지금에 이르렀다. 그들이 처음 이곳에 던져졌을 때 이 땅의 원주인 카자흐 사람들은 유목민들이라 씨를 뿌리고 거둘 줄 모르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이 땅 원주민들과 얽혀 살면서, 새로운 안식처를 카자흐인들은 농경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다. 역시 ‘한국 핏줄’은 고난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DNA’가 남 다르다.


현지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두 민족을 꼽는데, 고려인과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다. 전통적으로 새벽부터 앞마당을 쓰는 민족은 두 민족밖에 없다고 했다. 그 부지런함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 '긍정의 아이콘'이 되게 했다. 현지인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의 이미지가 아주 좋은 편인데 근면 성실한 고려인들의 역할이 아주 컸다.


얼떨결에 맺게 된 사제의 인연

한 날은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는데, 성가대 리더이신 고려인 할머니가 나에게 다가오셨다. 그리곤 두 손을 포개 잡아 주시면서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물어보셨다. 교회 집사님이신 그분의 성함은 '리 옐레나 알렉산드로예브나' 였는데 도무지 한 번에 기억할 수 없었다. 이름이 거의 한 문장 길이라 '텅 트위스터 - 혀가 꼬이는 문장' 같았다. 현지 예법 상 부성까지 붙여서 풀 네임을 불러드려야 존칭이 되는 터라, 그분 이름을 부를 때는 늘 입을 한 번은 풀어 줘야 했다.


혹시 우리 심켄트 고려인문화센터에서 거저 한국어 선상님 해줄 수 있습니까?
한국말 선상님이 없어서 우리가 마이 바쁘다요!


한국어 선생님으로 초빙해 주시는 것 같은데 '선생님이 없어서 많이 바쁘시다'는 말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되물어 보니 ‘바쁘다 - 힘들다’라고 하셨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한국어 선생이란 갑작스러운 제안에 바로 답을 드리지 못하고, 일단 생각해 보고 다음 주 예배 시간 때 대답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리곤 교회를 빠져나왔다. 사실 그때는 두 번째 카페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는 때였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이유가 있으니 정중히 거절하거나 나중으로 미룰까도 생각해 봤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국어 선생님이 없어서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신다니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론 오죽하면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에게 부탁하실까 싶었다.


고민하는 나에게 아내는 좋은 일이니 비싼 척 빼지 말고 도와드리라고 했다. 아내는 자기가 할 것도 아니면서 인심을 팍팍 썼다. 사실 나는 거절을 잘 못 하는 편인데 아내까지 동의했으니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 바빠도 도와드리는 편이 낫겠지?


사실 전역 전에 혹시나 쓸 일이 있을까 싶어 '한국어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해 두었었는데 평생 쓸 일이나 있을까 싶었었다. 자격증을 취득한 이후 실습 경험이 없는 '장롱' 자격증, 어쩌다 보니 잊고 있던 자격증을 쓸 일이 생겼다. 한국어 수업을 돕기로 마음먹고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수업을 준비하려면 미리 공부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시간을 내서 도와 드리기로 했다.

바로 그것이 우리들의 특별한 인연, 그 시작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라도 괜찮을까요? 괜찮으시면 다음 주부터 시작하시죠.


물론 집사님은 쌍수 들어 환영하셨다. 알고 보니 이 집사님이 지금까지 고려인문화센터에서 한국어 교육을 해오셨다. 그분은 문화센터 총책임자이기도 한데 최근 여러 일로 많이 바빠지셔서 내게 특별히 부탁하셨다고 했다. '현대의 (남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원어민이 선생님이 왔으니 기대감이 크시다면서...


"샹!(욕 같지만 ‘지금’이란 뜻의 사투리) 내 학생들에게 말하겠소."

"학생들이 몇 분이나 되시죠?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지..."

"아! 학생들은 다 나이가 많다요. 저기 성가대 할머니들이라요."


헉! 청년이나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김칫국 마셨다. 최소 60대에서 70대, 지난번에 말씀 나눴던 80대 할머니도 계셨다. 뒤로 돌아 성가대 쪽을 바라보니 할머니들께서 가볍게 손을 흔드시며 새로운 한국어 선생님을 환영해 주셨다. 그분들을 보니 ‘학생보다 완전 젊은 선생’에 대한 기대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순간 부담이 확 밀려왔다.


과연 내가 잘 가르쳐 드릴 수 있을까?




기대 만발 첫 한글 수업


설렘 설렘. 첫 수업

약속한 첫 한국어 수업이 있는 날 미리 알려주신 주소를 찾아 문화센터로 향했다. 다행히 우리 카페와 멀지 않은 곳이라 오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 좋았다. 생각해보니 한국에 있을 때, 아내가 근무했던 사회봉사 시설에서 방과 후 수업 자원봉사로 초등학생들 영어 수업을 몇 달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때가 가르쳤던 학생들이 최연소 학생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최고령 학생들이 될 것 같았다.

문화센터 건물에 들어서니 칸칸이 좁은 공간에 각 민족의 이름이 붙어 있다. 카자흐스탄에 140여 종족 이상이 모여 산다고 그러더니 역시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답게 복도를 따라 나열된 민족 이름들이 많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면서 보니 한 민족을 위해 할당된 공간이 채 두 평도 안 될 것 같았다. 그 많은 민족들에게 공간을 하나씩 주려니 이 큰 건물도 부족한가 싶었다.


고려인 문화센터는 건물 2층에 있었다. 2층으로 올라서니 복도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집사님과 학생 몇 분이 나를 향해 이쪽이라고 손짓하셨다. 집사님의 안내로 고려인 센터로 들어서는데 두 평도 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학생들이 꽉 차 있었다. 선생님 오셨다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셔서 맞아주시는데, 정말 몸 둘 바를 몰라 얼굴이 다 빨개졌다. 이렇게까지 열렬히 환영해 주시다니... 황송스럽기 그지없었다.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선생님을 위한 자리'에 섰다. 지난번 말씀대로 대부분 익숙한 얼굴의 교회 성가대 대원들이었고 새로 온 한국어 선생님 소문을 듣고 오신 분도 있었다. 나와 가까운 쪽으로 가장 연세 있으신 분들이 앉아 있었고 젊어 보이는 사람들은 입구 쪽과 문밖에 서서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 서 있는 사람까지 대략 열다섯 명. 생각보다 배우러 모인 학생들이 많았다.


바로 앞에 앉은 분과의 거리는 채 50cm 남짓, 침이라도 튈까 조심스러웠다. 너무들 집중해서 나를 쳐다보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는데, 어떻게든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아 첫 시간이니 돌아가면서 간단한 자기소개와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를 말하기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레나입니다. 나는 80살입니다. 나는 손녀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맨 앞, 가장 연세 많으신 할머니께서 일어서셔서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을 시작하셨다. 의외로 모인 학생 중 가장 한국어를 잘하셨다. 여든이라는 연세에 한국어를 못하는 손녀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열심히 배우시겠다니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았다.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몇 분들은 아예 한국어를 못해서 러시아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오히려 젊은수록 잘 못했다. 수줍은 소녀같이 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자기소개를 하시는데 어찌나 귀여우신지 웃음이 절로 났다.

2시간 수업을 생각하고 왔는데, 자기소개가 끝나니 훌쩍 한 시간이 지나갔다. 서둘러 한국문화원에서 받으셨다는 한국어 교재를 펼쳐서 수업을 시작했는데, 러시아어밖에 못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기초 문법을 설명하는 것조차도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러시아어로 한국어 문법을 설명하기에는 아직 내 러시아어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다고 첫 수업은 표정과 몸짓으로 겨우겨우 설명을 이어갔고 두 시간이 훨씬 지나서 첫 수업을 마쳤다. 아주 전문적인 설명은 아니었지만 '온몸을 불살라' 열강한 정성에 큰 박수갈채를 보내주셨다.


아... 다음 시간에는 어떻게 하지?


벌써 다음 시간이 걱정됐다. 아무래도 잘 가르치기 위해 어쩌면 내가 러시아어를 배우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재를 챙겨서 인원이 너무 많아 숨쉬기조차 답답했던 센터 밖으로 나서니 숨통이 좀 트였다. 왠지 모르게 일어나는 뿌듯한 마음. 부족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 행복한 일이다.


공부도 식후경! 가끔 자축 다과회도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연금 주머니를 비워

고려인문화센터 늦깎이 학생들의 선생님 사랑은 각별했다. 가끔 우리 카페로 우르르 몰려왔는데 늘 빈손으로 오지 않고 무언가 하나씩 들고 왔다. 직접 만들어 가져온 은은한 술 냄새와 새콤한 맛이 일품인 증편, 구수한 콩고물 찹쌀떡 등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했다.


아니 이 귀한 걸...


사실 우리 학생들은 대부분 연금을 받으시는 분들이라 다른 수입이 거의 없는 분들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연금 주머니를 비워 나를 채워주시려 하는 마음이 너무도 감사하고 또 미안했다. 작은 것들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처음 신문에 나다

어느 수업 날 심켄트 지역신문사에서 나온 기자가 우리 한국어 수업 사진을 찍어가겠다고 찾아왔다. 괜히 부담스러워 나는 빠지겠다고 했는데, 선생님은 무조건 같이 찍어야 한다고 해서 얼떨결에 학생들과 같이 찍었던 사진이 지역신문에 기사화되어 출간되었다. 뿌듯함과 동시에 또 다른 부담이 밀려왔다.


아, 이젠 벗어날 방법이 없구나!


아무래도 신문에까지 난 이상 한국어 수업에서 벗어나는 건 글렀다는 게 직감됐다.


안녕하십니까! 한글 수업이 소개된 지역 신문


선상님은 고정 '주연'


옐레나 집사님은 늘 환하게 웃으시며 다가오셨다. 선생님으로 시작될 인사와 안부 뒤에는 늘 예상치 못한 부탁이 뒤따랐다. 소녀처럼 해맑게 웃으시며 손을 잡으시면, 어떤 부탁이든 거절할 수 없는 내 대답은 늘 'Yes'였다.


사실 고려인문화센터는 정부에서 주최하는 다양한 다민족 문화행사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는 일이 잦았다. 문제는 적극적으로 행사를 지원할 고려인 젊은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젊은 층은 학업으로 직장에서 또는 사업장에서 치열하게 살다 보니 봉사 활동을 위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우리 가족은 마치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당한 연령대에 어린 자녀들까지 있으니 각종 문화행사에 구색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신년 행사 - 새해 세배 주연

다가오는 신년 아침에 정부에서 주관하는 다민족 행사가 있습니다.
민족별로 ‘새해 아침 풍경’을 준비해야 합니다.

집사님은 항상 '무엇을 언제 해야 합니다'라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즉, '주연'은 정해져 있다는 얘기였고 그건 바로 나와 우리 가족이었다. 이번에는 다 같이 한복을 차려입고, 전통음식으로 차린 식탁 앞에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세배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 한다고 하셨다.

"그럼, 새해 식탁에 올릴 비빔밥 같은 전통 음식을 좀 만들어 드리면 되나요?"

"아니요. 이번에는 세배를 좀 해주면 좋겠습니다."

"네? 세배요?"

아주 당황스러웠지만, 두 손을 꼭 잡으시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행사 당일 아침 결혼식 때 맞추었던 화려한 한복을 오랜만에 차려입고 아이들에게도 한복을 입혔다. 딸들에게 세배 연습차 몇 차례 큰절을 가르치고 시켜보았는데, 자리에 앉다가 무게 중심을 못 잡아 뒤로 넘어가기도 하고 옆으로 넘어지기도 했다. 스스로도 웃기는지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으며 뒹굴었다. 아직 세 살밖에 안 된 막내는 도무지 균형을 못 잡았다. 하기야 잘하는 게 이상한 나이기도 하다.


행사장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다양한 민족이 모여 각 민족의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고 리허설을 하느라 분주했다. 택시에서 내려 다민족 문화센터 내부에 마련된 본 행사장으로 들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눈에는 역시 한복이 제일 아름다웠다. 아니나 다를까 화려한 한복을 입고 행사장 입구를 가로질러 가는 우리 가족에게 이목이 집중됐다.


그래, 역시 한복이지!


조금은 우쭐한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카자흐스탄 전통의상을 입은 한 아이가 신기하다는 듯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끄라씨바야! Kрасивая-아름다워요!


그 아이와 그를 찾으러 온 엄마는 연신 "끄라씨바야! Kрасивая-아름다워요!" 하면서 우리 옷을 쓰다듬듯 만져보고선 사진을 같이 찍자고 청했다. 그리고는 또 다른 가족이 또 이어서 다른 민족들이 사진 찍기를 원했는데 마치 이 행사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했다.

그리고 행사 주최 측 주관으로 이어진 몇 번의 총 리허설.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어 의식됐는지 장난기 많은 아이들도 제법 진지하게 임했다. 둘째는 잘 앉기는 했는데 일어서다 웅크린 채로 뒤로 넘어가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행사가 잘 마무리되었고 이제 끝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매년 반복되는 신년행사의 시작이었다. 한 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갈 수 없는 세계. 우리보다 젊은 가정이 이민 오면 꼭 물려주려 했던 막내 교민의 ‘숙명적 과업’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이후로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늘 ‘주연’이어야 했다.

고! 정! 주! 연!




인기가 가장 많았던 한복

한복을 입을 일이 있을까?

그래도 챙겨가 보자!

인테리어 소품으로라도 써보게...

그렇게 가져갔던 한복이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정말 우리 한복은 이곳에서 사명을 다했어!"


지역신문에 소개된 행사(새배) 자료


무려 전통혼례

여러 문화 행사 참여 경험 중 단연 최고는 '민족 화합의 날' 행사였다. 다민족 국가의 단합을 과시하는 이 대형 이벤트 날짜는 매년 5월 1일. 카자흐스탄 전역에서 치러지는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 중 하나다.

옐레나 집사님이 이번에는 '반드시'도와줘야겠다고 하셨는데, 이례적으로 대통령 방문이 계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이번 행사는 고려인문화센터의 자존심이 걸려있습니다!"

"아, 네. 그럼 이번에도 한복 입고 세배하는 건가요?"

"아니요. 이번에는 전통혼례입니다."

"아... 한국에서도 해본 적이 없는데..."


정말 하다 하다 한국에서도 안 해본 전통혼례를 카자흐스탄에서 하게 생겼다.

반드시 해달라고 하시니 도와 드리긴 해야겠는데 문제는 아내가 이렇게 '형식적이고 공식적인' 무대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아 설득이 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전통혼례래. 같이할 거지? 내가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는 걸 눈 뜨고 볼 수 있겠어?


난생처음 입어 보는 전통 혼례복과 사극에서나 봤던 장화 같은 신발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아내는 나를 보고 이방이나 내시 같다고 놀렸다. 다른 민족들도 대표자들이 전통혼례 복장을 하고 나왔는데 어찌나 화려한지 눈이 다 어지러웠다. 잠시 휴식 시간을 이용해 한 바퀴 둘러보니 딱 봐도 우리가 제일 늙은 신랑, 신부였다. 행사 참여자들이 대부분 십 대 후반의 꽃다운 나이의 젊은 친구들이었다. 실제로 카자흐 사람들은 빠르면 십 대 후반, 늦어도 이십 대 초반에는 대부분 결혼을 한다. 심지어 ‘조혼’ 관습도 아직 남아 있다.

눈에 띄는 독특한 전통혼례 복장 때문인지, 아니면 신랑 신부의 얼굴이 궁금해서인지는 몰라도 한국 전통 혼례식을 구경하러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한국의 신랑과 신부를 대표할 주인공으로 우리를 발탁하신 집사님의 예리한 캐스팅이 적중한 것 같았다! 물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게 함정이지만.


파르르 떨리는 얼굴 근육 경련. 많은 사람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몰려와서 매번 활짝 웃어주다가 생애 처음으로 얼굴에 쥐가 나는 진귀한 경험을 해봤다.


나, 지금 떨고 있니?


급조된 양가 어머님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수많은 ‘새 New’ 어머니가 생겼다.

행사 때마다 새로운 분이 어머니 역할을 맡아주셨기 때문이다.


한 번도 힘든 결혼식, 두 번이나 아주 특별하게 마쳤다

이보다 더 많은 하객을 모신, 그것도 다민족 하객을 모신 혼례를 어느 누가 경험해 봤을까?

행사 참여는 늘 부담되었지만, 사는 날 동안 다시없을 특별한 추억을 남겨주었다.




추석에는 노래를!

저희는 이제 행사 출연으로는 여기까지만 돕겠습니다.

민족 화합의 날 행사를 끝으로 이제는 이 자리를 누군가에 양보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갔었다. 다행히 행사도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이제 기분 좋게 말씀드릴 일만 남았다.

저, 집사님. 이제...
아. 선상님! 오늘 고생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가 최고였어요!
그래서 말인데 오는 추석엔 노래를 좀 부탁합니다!
아.. 그게... 네. 알겠습니다.


허. 결국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결국 '다음'을 접수하고 말았다.

추석 행사 준비를 미리 부탁하셨는데 '아리랑'을 포함한 한국 노래를 한 두 곡 불러 달라고 하셨다. 갈수록 주문이 구체적이고 강도도 세졌다.


나의 기타 연주에 맞춘 아리랑과 노사연의 만남. 추석에는 이 두 곡으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쑥스러운 마음에 얼른 무대를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사회자가 달려와서 우리 가족을 자리에 세웠다. 그동안 한국어 교실과 더불어 다양한 고려인센터 문화행사를 지원해주고 빛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심켄트 고려인협회 '유가이(유 씨)' 회장님이 감사장을 친수해 주셨다.




우리 가족은 '21세기 신 고려인'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인연은 더 깊어졌다.

서로를 알아주고 안아주는 것만큼 따뜻한 것은 세상에 없다.




한 번쯤은 그 누군가의 꽃이 되어


지금 아니면 못할 일

우리 부부는 이루고 싶은 또 하나의 꿈이 있었다. 그것은 현지인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직원들과 함께 성공의 기쁨을 누리는 것과 그 단계를 지나면 사업을 통해 발생한 수익의 일부를 선한 일로 현지에 환원하는 것이었다.


아내와 공원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환율 폭락 이후 사업 여건이 좋지는 않지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작은 실천을 시작해보기로 마음을 모았다.


작은 도움이라도 절실한 사람을 알아봐 달라고 직원들에게 부탁했는데 며칠이 지나 소식이 왔다. 9살 된 한 여자아이가 악성 뇌종양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데 이젠 혼자선 걷지도 못한다고 했다. 하루빨리 수술해야 하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엄두도 못 내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우리도 딸을 둔 부모라 마음이 더 짠했다.


이건 우리가 단독으로 돕기엔 너무 큰 일인데...


애초 우리 계획은 비밀리에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만큼 돕는 것이었는데, 이 일은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도울 방법은 없을까?"

"음... 자선 바자회를 열어보는 건 어떨까요?"

"자선 바자회?"

"우리가 카페를 하니까 음료와 음식을 내고, 한국에서 가져온 예쁜 젓가락이나 부채 같은 기념품들 그리고 당신이 요즘 이벤트로 그려주고 있는 캘리그래피 같은 것들도 좀 팔아서 성금 마련에 보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아내의 제안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어 보였다. 또 성금 모금을 위한 바자회를 열어서 다수에게 홍보가 된다면, 일회성 도움뿐만 아니라 뜻있는 누군가가 계속 후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런데 누구와 함께 하지? 바자회를 하려면 손이 많이 필요한데...


문득 한국어 교실 학생들이 떠올랐다. 사실 고려인문화센터에서 한글 수업을 시작한 이후로 도시에 소문이 났는지 많은 현지인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한국어 개인지도를 부탁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무료 한국어 교실을 카페에 열었는데 한두 명씩 모이더니 어느새 스무 명 가까운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한국어 교실

"이번 자선행사에 함께 참여할 사람은 수업 후에 남아 주세요."


수업 시간 내내 과연 몇 명이나 남으려나 궁금했는데 감사하게도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저는 그림을 몇 장 그려올게요. 현장에서 인물 스케치도 가능해요."

"우리 댄스동아리는 케이팝 플래시 몹을 할 수 있어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터져 나왔다. 역시 젊은 친구들이라 생각이 참신했다.

"우리는 음식을 서빙할게요."

"우리는 행사에 필요한 스피커나 책상 같은 물품들을 협조받을 수 있는 곳을 알아볼게요."

특별한 개인 재능이 없는 친구들도 적극적으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내놓았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복잡할 것 같았던 행사가 어느새 반쯤은 진행된 분위기였다. 그렇게 한 사람을 돕기 위해 많은 사람이 일어섰다.


자선행사 스태프를 자청하는 친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행사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성공적인 행사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는 것이었는데,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만한 중앙 공원이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입을 모았다. 날짜는 기억하기 쉽게 8월 8일, 시간은 하루 중 공원 이용 인원이 가장 많은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자선 바자회 SNS 홍보자료


우리 카페에는 행사 홍보물을 붙이고, 특별 모금함을 만들어서 비치했다. 학생들은 스스로 전단을 만들어서 행사 홍보를 도왔고 각자의 SNS에도 많은 사람이 행사장을 찾아올 수 있도록 포스팅했다. 덕분에 이 특별한 행사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고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져 갔다.


여름 열기보다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들

드디어 협찬받은 스피커를 통해 케이팝 음악이 흐르고 행사 시작을 알렸다. 특히 케이팝 댄스 동아리 군무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준비했던 음식과 음료들은 매진되었고, 아직 어설프지만 직접 만들어갔던 한글 캘리그래피도 몇 장 남지 않았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은 현장에서 인물 초상화로 모금을 도왔고, 미리 그려 온 BTS나 EXO 같은 한류스타들의 인물화 스케치는 판매 시작과 동시에 완판 되었다.


적극적인 홍보 덕에 많은 사람이 먼 곳에서도 찾아와 주었고, 8월의 무더위를 피해 공원으로 산책 나온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게 성금이 모금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한 뜻으로 힘을 모아 의미 있는 자선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열쇠가 굳게 채워진 성금 함에 얼마가 모금되었는지 확인은 않았다. 모금함을 열쇠와 함께 그대로 전하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걷기 불편한 아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따로 휠체어를 사서 선물로 보탰다. 성금과 선물이 전해진 다음 날 아이의 부모에게서 정말 감사하다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모두의 고생을 녹이는 편지였다.




가장 고생을 많이 한 바자회 자원 스태프들

어떤 학자가 누군가를 돕는 것은 외려 베푸는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복'이라고 했다.


남을 돕는다는 건 역설적으로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그 말이 정확히 가슴에 닿은 느낌이었다.


또 하나 좋았던 점은 분주하게 준비한 행사 덕분에 살인적인 8월의 무더위도 훌쩍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라는 작은 존재의 울림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초여름 남카자흐스탄 주 대형 신문사 기자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우리 가족과 한국, 한류, 한식에 관해 인터뷰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좀 쑥스럽지만, 우리 카페를 홍보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응하기로 했다.


이번에 인터뷰하게 된 신문사는 대한민국보다 더 넓은 지역을 커버하는 신문사로 4개 시와 11개 군에 정기 발행되는 신문사였다. 어떻게 이곳 심켄트까지 와서 사업을 하게 됐는지, 한국 전통문화와 한식 소개, 우리 카페의 특징, 고려인 문화센터 봉사 활동과 한글 교육 무료 봉사 활동 등 다양한 주제로 두 시간 정도 인터뷰가 진행됐다. 기자는 칠월 말쯤 신문에 인터뷰한 내용과 제공한 몇 장의 사진이 신문에 실릴 거라고 귀띔해 주고 자리를 일어났다.


신문 한 구석에 조그마하게나 실리겠지.


그저 한 낱 이방인인 우리가 이렇게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개무량했다.

언니, 오빠! 신문에 났어요!


그리고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칠월 마지막 날자 신문에 우리 이야기가 났다며 출근하던 직원이 신문을 내밀었다. 신문 한쪽 지면을 가득 채워 우리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인터뷰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는데 한복판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찍은 큰딸의 모습이 너무 예쁘게 나왔다.


일면을 가득 채운 우리 이야기


신문사에 이어 지역 방송사와 인연이 닿아 남카자흐스탄 주, 주 정부 주관 고려인(한국) 전통문화 홍보영상도 찍게 되었고 공중파 방송까지 타 보았다.


시간이 지나 의도치 않은 칭찬과 보상도 따라 주었는데 남 카자흐스탄 주 정부 주관 공로자 초정 행사에서 주 주지사로부터 감사장도 받게 되었다.


주 정부 감사장




사실 이런 황송한 '인정'들도 좋았지만 이 낯선 땅에서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라는 작은 존재가 이 땅에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삶이 더 감사하고 좋았다.




keyword
이전 08화6장. 바람을 타거나 일으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