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성장통 없는 성장은 없다.
- 2015년 늦여름, 겨울일기
- 통곡의 크리스마스
- 아슬아슬한 홀로서기
- 애증, 카자흐스탄!
- A.S.K! 비상구를 찾다
- [1부. 카자흐스탄 편을 마치며] 카자흐스탄, 성장통
[2015년 늦여름, 겨울 일기]
2015년 8월.
환율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는 개선될 기미가 안 보인다. 취약한 카자흐스탄의 경제 구조도 문제다. 세계 9위의 산유국이 어찌 이리 국가 경제력이 취약한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현지 화폐인 텡게화가 달러 대비 25% 폭락한 게 얼마 전인데, 다시 환율이 폭락하게 된다면 카페 운영을 계속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할 상황이다. 환율 간판을 볼 때마다 심장이 철렁한다. 얼마 전부터 환율 폭락 루머가 돌고 있는데 제발 이번만은 잠잠히 지나갔으면 좋겠다.
2015년 11월.
8월부터 출렁이기 시작한 환율이 오늘 11월 25일 폭락의 정점을 찍었다. 지난 1차 환율 폭락 후 그나마 미화 1달러에 180 텡게를 유지해 왔는데 오늘 환전소에 찍힌 실거래 환율은 1달러에 420 텡게를 넘어섰다. 놀람을 넘어 경악스럽다. 모든 은행은 외환 거래를 일시 중지했다.
첫 카페를 연지 11개월 만에 65% 폭락.
도대체 얼마나 폭락한 거지? 한화로 대충 환산해 보니 사업을 시작할 때 1,000원의 가치가 이제는 350원밖에 되지 않는다. 한 러시아 경제 전문가는 카자흐스탄의 취약한 경제 구조 때문에 앞으로 추가 환율 폭락이 예상되고 1달러에 500 텡게 이상 갈 거라고 암울한 미래를 예견했다.
망연자실.
절망적인 상황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루가 지나면 10% 또 어떤 날은 20% 이상 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다. 그저 악몽이었으면 좋겠지만 매일 아침 직시해야 할 현실이었다. 이 비상사태를 어떻게 돌파해 나가야 할지 매일 대책을 토의해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긴 해야 하는데...
지금보다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완전 전의를 상실했다.
환율이 폭락하자 두 카페의 건물주들로부터 제일 먼저 연락이 왔다. 그간 현지화로 냈던 월세를 다음 달부터는 달러로 보내라고 했다. 환율 폭락 이전의 현지화 가치에 상응하는 금액의 달러로 받겠다고 했는데 계산해보니 임대료가 50% 가까이 오른 셈이다. 고민이 되지만 채 1년도 되지 않은 인테리어와 시설 투자를 전부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요구한 임대료를 낼 수밖에 없다.
시장 물가는 무서운 속도로 치솟고 있다. 시장에 유통되는 농산물과 공산품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서 즉시 환율이 반영된 상태로 판매를 시작했다. 제대로 된 맛을 내는 한식을 만들기 위해 매일매일 다량이 사용되는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와 참기름 등 주요 식자재들을 한국에서 수입해서 쓰고 있었는데, 환율을 생각해 보면 열심히 벌어도 재룟값이나 충당될지 미지수다. 불안한 경제 상황에 사람들은 주머니를 움켜쥐고 밖을 나서지 않았고 연중 가장 손님이 많아야 할 연말인데 카페를 찾는 손님이 급감했다. 도무지 손쓸 수 없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렇게 환율이 폭락한 채로 유지된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2015년 12월.
급격히 폭락한 환율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연말까지 420 텡게 대를 유지할 것 같고, 새해에는 더 위험하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전망이다. 매출은 감소했고 오른 임대료까지 고려하면 영업 이익은 급감해서 환율 사태 이전의 30%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나 한 사람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다. 사업 초창기부터 비자 문제로부터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급이 다르다. 파트너도 우리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냥 뭔가 크게 잘 못 된 것 같다. 모두가 절망의 늪에 빠져 버렸고 누구도 쉬이 희망을 얘기하지 못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정말 내일이, 내일이 두렵다.
통곡의 크리스마스
연말은 다가오는데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 최대한 지출을 줄이고 바짝 움츠린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여보, 나 좀 이상한 것 같아요.
12월 중순 아내의 몸이 이상 신호를 보냈다. 12월 초로 들어서면서 감기 기운이 잦아지던 아내가 왠지 애들 가졌을 때와 몸 상태가 비슷하다며 혹시 임신한 게 아닌지 걱정했다.
그럴 리가... 정관 수술하고 왔는데?
요사이 스트레스를 너무 받고, 연말 준비에 너무 무리해서 몸살이 난 건 아닐까?
카자흐스탄으로 출발하기 직전 고심 끝에 정관수술을 받았다. 돌아올 배를 태운다는 각오로 마지막에 내가 결심했던 것이 정관수술이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사업 준비 중에 아이가 생기면 변수 중 변수가 되리라 생각해서 아내를 설득해서 수술을 받았다. 그러니 아이가 생겼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내는 한국에서 비상용으로 가져온 효과 좋은 감기약 먹기를 거부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몸살감기약을 먹기 전에 꼭 확인해 봐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첫째와 둘째를 가졌을 때와 너무 몸 상태가 비슷하다면서. 엄마의 직감은 정확했다. 다음날 약국에서 간이 임신테스트기를 사서 확인해 보았는데, 임신을 알리는 두 줄 선이 진하게 나타났다.
"아... 어떻게 된 거지? 어... 일단, 여보... 축하해."
아내도 나도 너무 당황스러웠고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일단' 축하한다고 했다.(나중에 너무 후회했다. 그때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어도 아주 축하한다고 해줬어야 했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 다음날 시설이 좋은 개인병원을 방문해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아이가 보인다고 축하해 주며 2개월이 조금 넘은 것 같다고 했다.
"아... 확실히 아이가 생긴 거죠?"
물어볼 필요도 없는 확인 질문을 한 번 더 하고 확실하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셋째의 임신이 믿어졌다.
여보, 축하해...
그렇지만 지금 상황이...
아내는 아이가 생긴 것은 너무 기쁜 일인데, 당면한 상황이 어둡다 보니 솔직히 첫째나 둘째를 가졌을 때처럼 기쁘지 못한 자신이 너무 슬프다며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눈물을 왈칵 쏟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자녀는 축복이라잖아. 그러니 복인 거지. 어려운 상황에서 태어날 아이니 분명 강한 아이가 될 거야. 태명을 다니엘로 하자.”
불운한 걸까? 러키한 걸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의사에게 문의도 해보고 관련 의학 정보도 찾아보았는데 생각보다 나와 같은 고민으로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결론적으론 정관수술 후 수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정자가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임신이 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수년이 지나 정관이 자연 복구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런 아주 드문 경우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아주 러키한 거겠지? 아님 생명력이 아주 강하거나...
연유는 어떻든지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니 기쁨으로 받기로 하고 바쁜 연말 일상으로 돌아왔다.
12월 23일. 그날도 식당에 크리스마스와 연말 분위기를 내려고 카페에 트리와 점멸하는 전구를 설치하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추운 날씨에 고생한 아내가 이상하게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을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다. 아무래도 임신 초기라 몸이 피곤하니 배탈이 난 게 아닌가 싶었다. 그사이 나는 마무리하지 못한 장식을 내일 마무리하려고 장식 재료들을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크게 우는 소리가 들려 급히 나와 보니 화장실 앞에서 아내가 펑펑 울고 있었다.
왜 그래? 배가 많이 아파?
그게 아니라... 아이가...
그날 셋째는 유산되었다. 유산된 아이에게 정말 미안하다며 펑펑 우는 아내를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 그간 이를 악물고 참아왔던 모든 설움들까지 솟구쳐 눈물을 쏟아내듯 울었다. 어떤 말로 위로가 될까? 괜찮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더 아팠다.
눈물로 적신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시설이 열악하고 의료기술 수준도 낮은 걸 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밤새 울었던 아내는 눈은 부을 대로 부었고 유난히도 추운 날씨에 부들부들 떨면서 병원으로 들어섰다.
“보호자는 나가서 기다리세요!”
병원에 들어서니 간호사가 진료하는 동안 보호자는 나가서 기다리라고 나를 밖으로 매몰차게 몰아냈다. 잠시 후에 진료를 마친 의사가 나와서 유산이 되었는데, 산모의 건강을 위해서 자궁 속을 깨끗하게 정리해 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회복과 경과를 보기 위해 최소 일주일 정도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네? 일주일이 나요?
아내는 최소 일주일을 입원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참고 있던 울음을 다시 터트렸다. 어린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최대한 빨리 퇴원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고 의사에게 애원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게 법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일주일을 입원해서 경과를 봐야 합니다. 이미 진료 접수가 되었고 지금부터는 병원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경과를 봐야겠지만 담당 의사가 퇴원해도 좋다고 할 때까지 입원 기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의사는 차갑고 단호하게 선을 긋고선 퇴장해 버렸다. 의사는 정말 너무도 퉁명스럽고 냉혈인 같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마음 같아서는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여보 어떻게... 내일이 크리스마스인데 우리 애들은... 당신 혼자서 이 연마 바쁜 시기에 어떻게...”
아내는 입원실로 이동되는 내내 울고 또 울었다.
“일단 빨리 회복하자. 그러면 의사도 내보내 주겠지. 애들은 걱정 말고 나도 있고 장모님도 계시니까. 식당은 내가 알아서 할게. 당신 건강만 신경 써.”
입원 병실 앞에 도착하니, 담당 간호사가 나는 한 발도 더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병원 규정상 하루에 딱 두 번, 한 시간씩만 면회가 된다고 했다. 그것도 선착순으로 면회 신청을 받고 앞서 온 사람들이 많으면 면회를 못 할 수도 있다며, 늦지 않은 게 좋을 거라고 주의를 줬다. 비용을 더 부담할 테니 독실이나, 2인실 같은 곳이 없냐고 몇 번을 물어봐도 병실이 없다고 했다. 아... 정말 없다고 믿어야 할까...
아내는 의사가 회진할 때마다 내보내 달라고 애원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결국 아내는 크리스마스를 병원에서 홀로 눈물로 맞이했고 나와 아이들은 엄마 없이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했다. 아직 세 살밖에 되지 않은 둘째는 엄마를 애타게 찾았지만 그저 곧 올 거라고 달래서 재울 수밖에 없었다.
입원 사흘째 되던 날 면회를 가보니 아내의 얼굴이 제법 밝아졌다. 크리스마스까지 지나고 나니 이젠 그냥 마음을 비우며 지내고 있다고 했다. 병원 생활은 할 만한지 물어봤는데 대답이 심각하면서도 웃겼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
가장 지옥 같은 때는 주사 맞는 시간인데 환자들을 주사실로 불러놓고 네다섯 명씩 한 줄로 세워서 뒤로 돌게 한 다음 차례로 주사를 맞힌다고 했다.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여기선 너무도 자연스럽고 환자들도 전혀 불만이 없다고 했다.
"아... 그건 좀 그렇네..."
퇴원할 때 치료비를 확인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국립병원이라 병원비가 완전 무료였다. 두 번이나 확인했지만 따로 지급해야 할 비용이 없었다. 이건 또 의외였다. 기본 복지는 제법 잘해주는 나라였다. 어쩌면 이래서 현지인들에겐 치료 환경이야 어떻던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자리에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고 아내는 한해를 단 하루 남겨둔 12월 30일에 퇴원할 수 있었다. 한동안 몸과 마음이 아프겠지만 또 털어버리고 일어서야 했다. 오랫동안 집을 비웠던 아내가 돌아오니 집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고 웃음이 되살아났다.
통곡의 크리스마스...
이번 크리스마스는 아내의 소중함, 서로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은 통곡의 크리스마스였다.
그렇게 우리에게 잠시 왔던 아이를 보내야 했다.
태명으로 지어 주었던, 셋째의 이름 다니엘을 그때부터 나의 영어 이름으로 삼았다.
그날 셋째의 몫까지 살아주겠다고 약속했기에 나에겐 한몫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아슬아슬한 홀로서기
2016년이 시작되면서 싸샤는 아무 조건 없이 두 곳의 카페 일체를 우리에게 넘겨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동안 먼 곳에 와서 고생했으니,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길 바라.
이제 언어도 제법 하고 운영 노하우도 충분히 쌓였으니 무난히 홀로서기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어려울 때는 언제든 달려와 돕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참 고맙지만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는 그의 결정이었다. 다만 그동안 겪어본 그의 성격상 그의 결정을 돌이킬 방법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같은 꿈을 꾸었고 한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온 사람이었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함께 웃지 못할 지금의 상황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렇게 최악의 위기의 상황 속에서 시작한 아슬아슬한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가 떠난, 그가 항상 앉았던 빈자리를 보며 처음 들었던 마음은 더 막막해지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과 부담감이었다. 그동안 그가 담당해 주었던 많은 일을 이제 나와 아내가 나눠서 지고 가야 할 몫이 되었다. 어깨에 짐은 더 무거워졌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보자!
다시 한번 힘을 내야 했다. 개업 이후 지금껏 우리를 믿고 따라와 준 가족 같은 15명 직원의 생계도 우리 손에 달려 있고 사실상 우리도 가진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라도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다.
우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단 큰 투자 없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부터 찾기 시작했다.
한국어 어학원을 시작해볼까? 그동안 경험이 쌓였으니...
고려인문화센터와 열린 한글 교실 강의 경험을 살려서 작게라도 유료 한국어 어학원을 운영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더욱이 장소를 카페로 사용하면 되니 별도의 투자비용 없이 시작할 수 있고, 더불어 카페 홍보도 될 것 같아 여러모로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참, 당신 유학파 대학교수 친구 있지 않아요? 그 개인 과외한다던?"
"머랄 교수? 아, 맞아. 그 사람 영어 과외한다던데... 한번 제안해 볼까?"
평소 친분이 있던 머랄 교수는 나의 제안을 듣고 한동안 고민했는데, 마침내 함께 조인하기로 했다. 현직 대학교수와 ‘검증’된 한국어 선생님이 가르치는 어학원은 조금씩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조금씩 자체 제작 교재도 만들기 시작했고 조금씩 전문 어학원 느낌을 풍기는 학원으로 변모해 갔다. 가능성 하나만 보고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학생 수가 많이 늘기 시작했고 카페 인근의 다른 장소를 임대해서 학원 규모를 늘려야 했다. 사실 학원 사업으로 큰돈을 벌 순 없었다. 주머니 사정이 뻔한 현지 학생들에게 비싼 수업료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학생들이 모이니 그들의 관심사 위주로 파생되는 상품과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어 사업기반인 카페 운영에도 도움이 되었다.
동기부여 차원에서 학원에서 열심히 배운 학생은 우리 카페 우선 채용 기회를 주었고, 공석이 날 때마다 한 명씩 채용되었다. 그들은 열심히 한국어를 배워서 실제로 쓸 수 있는 한국 카페에서 일할 수 있어 좋았고, 우리는 이 도시에서 아주 귀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을 보유할 수 있어서 서로에게 윈-윈이 되었다.
학원 사업을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기억은, 한국 사랑에 푹 빠져 있던 한 학생이 단번에 알마티에서 치러진 한국어 능력시험 TOPIK에서 단번에 4급(3급 이상이 한국 대학에 입학조건)에 합격해 모두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는 나중에 첫 번째 카페 매니저로 채용되었고, 나와 더불어 한국어 강사로도 활약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열심히 한국어 수업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왔다.
"심켄트 신도시에 소재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브 대통령 학교에서 단기과정 한국어 선생님을 초빙하는 데 지원해보실 의향이 있으세요?"
"아, 그럼요!"
그렇게 대통령 설립 명문 학교에서 한국어 수업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젠,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의료진료, 비즈니스, 대학 편입 등을 목적으로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현지인들의 서류 번역과 비자 취득 등 컨설팅업도 병행했다. 사실 이런 일들은 카페를 개업했던 초기에 경험도 관련 전문지식도 없어서 모두 무료로 조금씩 도와주었던 일들이었다. 그렇게 도왔던 경험이 쌓여 '전문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어떤 학생은 우리의 도움으로 한국 대학교 어학연수 과정에 편입할 수 있었고, 어떤 이는 지병 치료 목적으로 그 분야에 가장 적합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한국 병원으로 또 어떤 이는 그동안 꿈꿔왔던 한국과의 무역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으로 곧 떠나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것은 그들과 마지막 인사 나눌 때 가장 뿌듯한 한마디였다.
아내는 무역업을 하는 현지 친구의 도움으로 조그마한 한국 옷가게를 열었다. 나는 한국식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영향력을 확장해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 모든 일이 카페 두 곳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했던 일들이었다. 몸이 열 개라도 정말 부족했었다. 사실 그래야 잠이 왔다.
우리는 불안함에 마냥 움츠려 있기보단 한 발이라도 더 내디뎌 보기를 택했다.
그렇게 버텨보려 했고 그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치킨 프랜차이즈 개업 지원옛 실크로드 도시 '싸이람'에 우리의 기술 지원을 받은 첫 번째 치킨가게가 열렸다.
옷가게 열던 날
우린 그냥 한다
"정말 놀라워. 나는 몇 년째 이곳에 살면서 생각 해왔던 일들을 아직 하나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는데, 너희들은 만날 때마다 매번 다른 일들을 하고 있잖아? 신기할 정도란 말이야. 도대체 비결이 뭐야?"
한날 프레스턴이라는 선교사 출신 미국 친구가 방문했는데 매번 전혀 다른 업종과 사업 확장에 도전하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는 늘 '웃으며 다니는' 우리 부부를 보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극복해 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우리 사정을 짐작조차 할 리 없었다.
비결? 글쎄... 우린 그냥 해.
생존을 위해 복잡해져는 안 되는 시기였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적고 그려서 바로 시작했다.
모든 시작의 원동력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이었다.
나는 이런 삶을 ‘달려가면서 기도한다’고 말하곤 했다.
아내는 ‘기도하고, 달려가죠?’라며 가끔 나를 붙잡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 있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었던 때였다.
헬기의 날개는
헬기를 띄울 수 있는 만큼 빠르게 돌지 않을 때
날지도 못하고,
급한 바람에도 전복될 수 있어 가장 불안하다.
나는 지금 헬기의 날개만큼이나 빠르게 돌고 있다.
그것만이 내게 작은 평안 주기 때문이다.
애증, 카자흐스탄!
2016년 초여름.
어느새 3년 만기가 도래하고 있는 노동 허가를 3년 더 연장하기 위해 비자 업무를 처음부터 도와주셨던 분께 다시 전화를 드렸다. 핸드폰으로 그분의 이름을 찾고 전화 신호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지난 키르기스스탄으로의 비자 여행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동안 비자 때문에 겪은 고초 때문에 그럴까?
비자라는 단어를 생각만 해도 치를 떨 듯 불안했지만 분명 법적으로 3년 후에 3년 더 연장이 가능하다고 했었으니 이번엔 절대 이변이 없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노동 허가와 노동 비자를 갱신할 때가 되어서요...
노동 허가 갱신을 위해 필요한 서류와 절차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분은 반갑게 안부를 나누고선 이른 시일 내에 알아봐 주겠다고 하시면서 노동 허가 갱신에 필요한 서류를 받아 가셨다.
얘기할 게 있어요. 만나서 얘기해요.
이틀 뒤 만나서 얘기할 게 있다고 전화를 주었다. 비자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우리는 열일을 제쳐두고 만남을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이 분이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면 정말 긴장됐다. 기억조차 하기 싫지만 3년 전 거주권 무산 때도 긴 얘기니 만나자고 했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법적으로 3년 연장 가능하다고 했었잖아요. 걱정 마요. 갱신하는 거니 뭔가 다른 서류가 필요한가 보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불안해하는 나를 아내가 진정시켰다.
그런데 약속된 장소에서 그분을 만난 지 채 2분도 안 되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믿기지도 않는 마치 '사형선고' 같은 말을 듣게 됐다.
"노동 허가, 노동 비자 갱신이 불가하답니다. 법이 바뀌었대요."
"네? 갱신이 안 된다고요? 아니... 그러니까... 지금껏 세금도 충실히 납부했고, 회사 문을 닫은 것도 아니고, 법을 위반한 것도 없는데 왜 안 되죠?"
지나온 3년을 돌아보면 이 나라에 득이 되었으면 득이 되었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우리에게 정말 이 나라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그래서도 안 될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근근이 버텨가고 있는 지금, 이런 대답을 해주어서는 안 됐다.
"다 알아봤는데 다른 방법이 없어요. 다시 거주권 신청을 고려해 보던지..."
무슨 법이 이렇게 밥 먹듯이 바뀔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화가 났다. 간곡히 하소연해보았지만, 이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분도 대행 업무를 해서 돈을 버시는 분인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우리 일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번 노동 비자가 만료되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 마치 거주권의 문이 닫혔을 때처럼 모든 상황이 처음 그 악몽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계태엽을 되감는 것처럼 3년 동안 이곳에서 겪었던 고난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이젠... 진짜 끝났구나...
도저히 지난 과정을 다시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환율 폭락 사태 이후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안간힘을 써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 수고가, 그 노력이, 그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했다. 악몽이라면 깨면 되겠지만, 이게 눈앞에 현실이라니...
그분은 소문에 최근 대대적으로 외국에서 온 회사 설립을 통해 노동 허가와 비자를 받고 실제 사업을 하지 않는 허위 사업가들과 일부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있다고 했다. 유령회사를 설립하고 다른 목적으로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들을 추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성실한 사업자인 우리도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거주권 신청 불가, 2번에 걸친 환율 폭락 그리고 노동비자 연장 불가.
해마다 재앙보다 더한 대형 폭탄을 연이어 맞았다. 우리가 뭐라도 잘못을 했다면 수긍이라도 될 텐데 그럴만한 이유도 도무지 대처할 방법도 없는 절망스러운 현실 앞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정리하고 떠나고 싶은데 이곳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터라 우리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정말 애증의, 아니 애증보다 더한 카자흐스탄이다.
A.S.K! 비상구를 찾다
갑작스러운 비자 갱신 불가 통보에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젠 정말 어떻게 하지...
돌아가면서 한숨만 내 쉴 뿐이었다. 다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있겠지만 나도 아내도 그것만은 안 된다고 마음을 모았다. 정말 이런 실패자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솔직히 죽기보다 더 싫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두 카페를 살리면서 다시 장기 거주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아야 했고, 그때까지 카자흐스탄이든 주변 나라든 잠시 머무를 거주 은신처가 필요했다. 어느 곳이든 합법적 장기 거주처를 찾지 못하면 결국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의 비자 여행을 시작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단 카자흐스탄 내에서 취직할 만한 곳이 있는지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현지에서 머물 수만 있어도 더 바랄 게 없는 상황이니 월급의 수준과 관계없이 현지 회사를 통해 장기비자만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아울러 혹시 카자흐스탄 주변 나라에도 최소 반년 정도라도 거처를 마련할 만한 곳이 있는지도 확인해 보았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더라도 노동 비자를 받기 위한 대기기간을 확보할 수 있고, 비자를 받기 위해 한 번만 다른 나라로 움직이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급하게 ‘구직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아직 몇 달 동안은 현재 노동 비자로 머무를 수 있으니, 지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면 어떻게라도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A.S.K! (Ask, Seek, Knock!)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반드시 어딘가 한 곳은 열릴 것이다!
마침 주 카자흐스탄 재외 한국문화원에 행정직원 공고가 올라와 있어 한줄기 희망을 품고 지원서를 냈다. 정말 남들에게 보여주거나 자랑하려고 만든 스펙이나 공적은 아니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난 3년 동안 심켄트에서 한국어 교실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사실과 주 정부, 심켄트 고려인협회 감사장까지 있는 대로 소상히 이력서에 적어서 첨부했다. 막상 쓰려니 왠지 겸연쩍어 몇 번이나 적고 지우고를 반복했지만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에 비해 내세울 게 그런 것들밖에 없었다. 운 좋게 채용된다면 가족들과는 떨어져 지내야 하겠지만 최소한 카자흐스탄을 떠나지 않아도 되니 가장 좋은 조건이었다.
또 한 곳 눈에 들어온 자리는 옛 그루지야, 현 조지아 공화국 소재 한국대사관 행정직원 선발 공고였다. 조지아는 현지 지인들에게 카자흐스탄에서 가깝고 지인들이 아름다운 나라라 여행 가기 좋은 나라라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여행 같은 것은 생각할 처치가 아니니 일단 카자흐스탄에서 가까운 곳이라는 장점에 무조건 이력서를 넣었다.
두 곳 중 한 곳만이라도 '러브콜'을 받을 수 있기만을 매일, 매시간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합격이나 면접 통보 소식이 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벌써 나이가 제법 많고 가족도 있으니 아무래도 선발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2순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어쩌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러나 나를 위한 자리
오지 않을 답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혹시나 자리가 있을까 싶어 해외 구직사이트에서 매일 같이 해외 일자리를 검색하곤 했는데 어느 날 그동안 보이지 않던 구인공고가 눈에 띄었다.
아프리카 케냐.
해외 근무 가능자. 영어 가능자. 수습 3개월. 기숙사 및 숙식 제공. 수습 후 가족 이주 적극 지원!
아프리카? 케냐? 케냐가 어디쯤 있지?
카자흐스탄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인터넷으로 세계지도를 열어서 케냐의 위치를 확인했고 동아프리카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카자흐스탄과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보니 딱 한국에서 카자흐스탄 거리만큼 먼 곳이었다. 항공편은 어떤지 검색해 보았는데 카자흐스탄에서는 직항 편이 없었다.
좀 멀 긴하네. 항공 직항편도 없고... 그래도 일할 수만 있다면...
아프리카와 케냐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과 정보, 경험이 없으니 그곳은 어떤 곳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다만 수습 기간 이후 정 직원으로 전환되면 가족 이주까지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니 그건 정말 괜찮은 조건이었다.
죽어도 같이 살고, 살아서는 당연히 같이 산다!
우리는 확고한 신조가 있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이주해 갈 수 있는 곳이라면 금상첨화였기 때문이었다.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서둘러 이력서를 넣었고 처녀 시절 아프리카 생활 경험이 있었던 아내도 적극적으로 응원했다.
"아프리카 케냐, 괜찮겠어?"
"여보, 미리 걱정하지 말고 일단 채용이나 되고 얘기하세요!"
정말 며칠 후 메일로 서류전형 합격 통보가 전해졌고, 면접을 위해 한국으로 올 수 있는지 회신이 왔다. 막상 채용 담당자 분도 내가 카자흐스탄에 거주하고 있으니 선뜻 한국으로 면접 보러 오라고 말하기 부담스러운 듯했다. 그렇게 먼 길 날아왔는데 면접 후 기대에 못 미쳐 떨어뜨려야 하는 상황이 되면 난처할 테니까.
생각해보니 한국까지 가서 면접에 떨어지면 비싼 비행기 삯만 허비하게 되는 꼴이지만, 한편으론 한국까지 달려가는 열정을 보여주면 채용을 결정하는데 더 확신을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도 이곳에서 직원 채용 면접을 볼 때, 도전 정신과 열정이 있는 사람이 눈에 먼저 들었으니까 사람 마음은 똑같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최기 비행 편으로 입국해서 면접 보러 가겠다고 대답을 드렸다.
한국행 항공권을 예매하고 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심켄트에서 알마티를 경유해 인천으로 가는 편도 항공권. 채용의 완전한 확신이 있어서 편도로 끊은 것은 아니었다. 채용되면 돌아오는 표가 필요 없을 것이었고 안 되더라도 기왕 한국에 들어간 김에 남몰래 허드렛일이라도 해서 급한 대로 돈을 좀 벌어볼 생각이었다.
'징징' 거리며 낡은 프린터로 더디게 출력되고 있는 항공권을 보고 있으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제 한국으로 떠나서 면접 후 채용되어 케냐로 떠나게 된다면 최소한 수습 기간 3개월은, 어쩌면 더 오래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다. 나 없이 혼자서 내 몫까지 담당해야 할 아내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아빠의 빈자리를 그리워할 아이들의 얼굴이 벌써 눈에 선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우리 모두에겐 지금껏 유례없이 가장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긴 그리움의 시간이 될 것이다.
공항, 만감이 교차하는 곳
한국으로 면접 보러 출발하는 날 심켄트 공항에서 아이들을 꼭 안아 보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재회를 기약했다.
"아빠가 먼저 가 있을게. 건강히 있다가 엄마하고 같이 빨리 아빠 있는 곳으로 와 알았지?"
담담한 척 서있던 아내의 볼에는 눈물로 마스카라가 흘러내렸다.
'왜 울어?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손으로 조심스레 마스카라를 닦아주었다. 더 있으면 마음이 더 아릴 것 같아서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한번 꼭 안아 주고 서둘러 입국심사대로 들어갔다. 이륙 방송이 나오고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데...
남자는 태어날 때, 부모가 돌아가실 때 그리고 나라가 망할 때 세 번 운다.
나는 카자흐스탄에 와서만도 도대체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을까?
심경은 참담하고 복잡했지만, 한 가지 바람만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음번 비행기는 케냐행이 기를...
전역 후 첫 면접, 오로지 할 수 있습니다!
"좀 고된 일인데, 할 수 있겠어요?"
"네. 문제없습니다. 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질문에 '문제없고, 잘할 수 있습니다'라고 일관했다. 오히려 너무 적극적인 모습에, 외려 채용담당자의 걱정 어린 눈빛이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문제없어서 문제없다고 하는 것인지...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
바라던 대로 면접 후 채용이 확정되어 바로 케냐로 출발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케냐. 사실 어떤 곳인지 모른다. '전혀 모른다'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사실 꿈에도 없었던 곳을 급한 마음으로 겁 없이 달려들었다. 어쩌면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몰라서 겁이 없이 도전할 수 있었기도 했다. 마치 카자흐스탄에 첫 발을 들일 때처럼. 앞으로 일이야 또 살아가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암흑 속에서 녹색 등이 켜진 비상구를 발견한 것만도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모른다.
면접 때 노트에 메모해둔 단어들을 보니 케냐, 가발, 황열 예방접종, 말라리아약... 생전 처음 듣거나 너무도 낯선 단어들이 가득했다. 얼마 후면 그저 평범한 일상 될 단어들일 테다.
케냐는 8월이 건기, 겨울이라니 거기는 좀 살만하겠지?
3년 만에 느껴보는 8월 한국의 습하고 무더운 날씨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건조한 땅에서 3년을 보내고 나니 체질도 바뀐 듯했다. 핸드폰으로 '굿 뉴스' 메시지를 아내에게 보내고, 매미 소리 시끄러운 들길을 걸어 내려오는 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케냐는 지금 겨울이라고? 옷은 어떻게 하지?
아... 여름옷만 잔뜩 들고 왔는데...
에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힌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 헬렌 켈러 -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으시면 다른 쪽 창문을 열어주신다.
- 러시아 속담 -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성경, 고전 10:13 -
세상의 모든 명언, 격언 그리고 속담을, 또 성경의 무수히 많은 성구들을 다 내게로 끌어와 이 감당하기 힘든 고난 가운데에서 이 절벽같이 끊어진 길에서 이 발버둥 칠수록 빠져드는 늪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을 들을 압축하고, 압축하고, 또 압축하니 한 단어가 남았다.
희망
화려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그저 실낱같은 희망.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오로지 한 줄기 빛 같은 희망이었다.
[너의 별을 따라가라. 1부. 카자흐스탄 편을 마치며]
카자흐스탄, 성장통
처음 3년을 보내기가 가장 힘들고 어렵다. 적어도 그만큼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한다.
- 헬렌 리어링, ‘조화로운 삶의 지속 Continuing the Good life’ 중 -
그래서 그랬을까?
첫 해외 이민과 창업 첫 3년은 너무도 힘들고, 어려웠고, 고통을 거듭했던 마치 인생 암흑기 같았다. 가끔은 정말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또 견딜 수 있는지 그 누군가에게 테스트를 당하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 언제까지 버틸래?
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고비가, 산을 넘으면 더 높은 산이... 피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절벽과 앞길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인간, 그 한계를 수도 없이 느껴야 했던 시간이었다.
부딪히고, 부서지고, 깨지고, 넘어지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고... 그게 일상이 되어 버린 삶이었다. 그 원대했던 꿈도 간절했던 소망도 팍팍한 현실에 맞춰 다운 싸이징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처음 꾸었던 꿈의 크기를 줄이면 줄일수록 마치 실패의 나락으로 점점 더 추락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끝까지 버텨보려 했다.
헌것을 날려 보내버려야, 새것을 잡을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처음 위기를 맞았을 때 '형편없이 쪼그라든 풍선일지라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아이'같이 어느새 미련이 되어버린 그러나 놓치지 않고 싶은 많은 것들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희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위기를 거듭할수록 손아귀에 힘이 점점 빠졌고, 오히려 그것 - 미련과 자존심을 놓쳐버렸을 때 다 잃은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손이 자유로워진 그때 새로운 풍선을 잡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옛 꿈에, 좋았던 과거에 여전히 미련으로 머물러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버릴 건 과감히 버려야 한다.
무엇보다, '잘' 넘어져야 한다
넘어지면 아프다.
넘어져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잘' 넘어지면 덜 아프다. 처음 넘어질 때는 넘어지는 방법을 몰라서 온몸으로 자유낙하 하듯 넘어졌다. 충격이 아주 컸다. 하지만 넘어질 때마다 '잘' 넘어지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사실 첫 번째 거주권 거부로 비자 여행을 시작했을 때와 첫 번째 환율 폭락 때가 가장 힘들었고, 그다음 사건들은 상황의 흘러가는 흐름을 보면서 이미 어느 정도 예측하였기 때문에 충격이 좀 덜 했다. 첫 번째 국경을 넘었던 경험과 실수를 교훈으로 다음 8번의 비자 여행은 큰 어려움 없이 넘나들었다. 첫 번째 환율 폭락 위기를 헤쳐 나가면서 얻은 교훈으로 도무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번째 환율 위기도 비교적 잘 대응할 수 있었다.
어른도, 유경험자도 그 누구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이미 충분히 넘어져 봤기 때문에 '잘' 넘어지는 법을 알고 있을 뿐이다. 시행착오, 실수는 잘 넘어지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일 뿐이다. 너무 자책할 일이 아니다. 확실히 많이 넘어져 본 사람이 잘 넘어지고,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서는 부담이 덜하다.
Fall forward! - 앞으로 넘어지세요!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미국 영화배우 덴젤 워싱턴 Denzel Washington이 한 대학 졸업 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넘어지더라도 앞으로 넘어지라는 그의 말은, 실패를 통한 '단 한 걸음만큼의 성장'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나는 '잘' 넘어지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함께여서 좋았다
돌이켜 보면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어쩌면 없어야 정상일 것 같은 카자흐스탄에서의 삶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좋았던 또 행복했던 추억이 참 많다. 왜 그럴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그 모든 날을 통틀어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나라를, 어려운 언어를, 경험이 없던 사업을 그리고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배우는 그 모든 날 동안 나와 아내와 아이들은 항상 함께였다. 사실 카자흐스탄을 살아낼 때는 잘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야 깨 닿게 되었다.
가족, 우리 함께라면 모든 것이 좋을 수 있는 것을...
정말 성장통 없는 성장은 없다
꿈은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하기엔 아직 너무 어렸다.
온 뼈마디가 아프고 열이 났던 극심한 성장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 아픈 만큼 성장했다.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각자 또 함께 성장한 카자흐스탄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함께 잘 지나왔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길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 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 고은 -
막다른 길, 'Dead end'
‘Dead end’는 막다른 길이라는 뜻이다.
‘Dead end’는 과거의 종결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절망과 희망은 오직 점하나 차이다.
'Dead, end! - 어둠, 그 죽음 같은 시간의 끝!'
오늘 막다른 길,
가장 어둡고 또 가장 밝은 그 끝에 서 있다.
이제부터
희망의 불을 켜고
자유롭게 길을 만들며 가면 된다.
역사를 만들며 가면 된다.
길을 만들며 가면 된다.
길이 있다.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