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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Oct 06. 2024

독립의 혼(魂), 화교 신문과 음반에 실려 퍼져나갔다

해방된 하늘 보지 못하고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이 직접 지은 '인도네시아 라야'는 바이올린 현을 타고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활이 현을 스칠 때마다 고요한 공기 속에 퍼져나가는 맑은 선율에 청중들은 숨죽인 채 온몸으로 느끼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인도네시아 라야의 바이올린 독주


'청년의 맹세 박물관'에는 바이올린과 레코드판 한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바이올린은 1928년 10월 28일 '청년의 맹세'를 낭독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민족 지도자들 앞에서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이 인도네시아 라야를 들려주기 위해 연주했던 악기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레코드판은 민족의 단결과 독립이라는 염원을 담은 와게의 노래를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지역으로 퍼뜨린 매개체였습니다.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이 인도네시아 라야를 처음 연주할 때 사용했던 바이올린


Kami Putera dan Puteri Indonesia, Mengaku Bertumpah Darah Yang Satu, Tanah Indonesia.
Kami Putera dan Puteri Indonesia, Mengaku Berbangsa Yang Satu, Bangsa Indonesia.
Kami Putera dan Puteri Indonesia, Menjunjung Bahasa Persatuan, Bahasa Indonesia.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아들딸들로서, 하나의 피를 나눈 조국, 인도네시아의 땅에 충성을 맹세한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아들딸들로서, 하나의 민족, 인도네시아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아들딸들로서, 하나 된 언어, 인도네시아어를 우리의 공용어로 삼고, 이를 굳게 지킬 것을 다짐한다.

- 청년의 맹세 (2024년 10월 28일)


인도네시아 라야의 노랫말 내용은 '청년의 맹세'와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청년의 맹세 대회 결의문의 초안을 잡았던 무함마드 야민이 쓴 시에도 '나의 피로 세운 땅, 인도네시아'라는 문구가 등장하지요. 자리에 모인 민족 지도자들은 와게의 노래를 듣고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라야를 국가(國歌)로 삼겠다고 선언한 민족 운동 단체가 곧 나타날 정도였습니다.


인도네시아 라야의 가사는 신문 매체를 통해 인도네시아 전국으로 전파됩니다. 1920년대는 인도네시아에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가릴 것 없이 신문 매체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던 때입니다. 1918년만 해도 40곳에 불과했던 신문사는 1925년이 되면 200곳으로 늘어나고, 1938년에는 400곳 이상에 이르게 됩니다. 기자였던 와게가 몸담은 화교 소유 신문사 신포(Sin Po)가 인도네시아 라야의 노랫말을 실었고, 술루 라캿 인도네시아(Soeloeh Rakyat Indonesia), 뻬르스 믈라유(Pers Melayu)를 비롯한 다른 신문사들도 노랫말을 받아적었습니다.


축음기에 담긴 인도네시아 라야 음원. 네덜란드 당국의 억압으로 '독립(merdeka)'이라는 문구 대신 고귀한(mulia)을 넣어 불렀다.


그렇지만 종이는 노래가락을 담지 못하지요. 당시 음원을 저장할 수 있는 매체는 축음기(phonograph)뿐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장시간 음반(LP: Long Playing Record) '검은 접시' 같이 생겼다고 하여 '삐링 히탐(piring hitam)'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축음기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기에 인도네시아 사람 가운데 이를 다룰만한 여력이 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화교 출신 사업가 티오 텍 홍(Tio Tek Hong)이 인도네시아 라야의 음원을 LP판에 담아 배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거상(巨商)이었던 티오 텍 홍은 1904년에 원통형 축음기를 수입하였고, 다양한 장르의 말레이어 노래를 LP판에 담아 인도네시아 전역에 보급하여 인도네시아 음악 산업의 선구자라는 평을 받는 인물입니다. 티오 텍 홍은 와게에게 인도네시아 라야를 녹음하자고 제안했고, 와게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테너가 인도네시아 라야를 불렀는데, 가수의 신원은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음반은 상류층을 중심으로 잘 팔려나갔고, 해외에 거주하는 민족 운동가들에게도 전달됩니다. 이렇게 인도네시아 독립의 혼을 담은 노래가 화교 소유 신문사와 음반 회사에 의해 널리 퍼졌다는 사실은 다민족 사회에서 화교 공동체와 인도네시아 민족 운동가들 간의 협력을 상징한다는 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한편,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인도네시아 독립을 외치는 인도네시아 라야를 불온 곡으로 여겨 금지곡으로 지정했고, 팔리지 않고 남은 음반은 모조리 압수당하고 맙니다. 1920년대는 인도네시아에서 정당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는데, 마르크스주의와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Partai Komunis Indonesia)'이 1925년말부터 1927년초까지 총파업과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인도 총독부는 현지인들의 모든 정치 활동을 강력하게 탄압하게 됩니다. 많은 공산당원이 악명 높은 보벤 디굴(Boven Digul)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청년의 맹세 대회도 네덜란드 비밀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몰래 열렸던 겁니다.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이 작사 작곡한 인도네시아 라야의 악보


인도네시아 라야를 발표하고 나서 와게의 삶은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식민 통치에 반항을 선동하는 곡을 썼다는 이유로 와게는 네덜란드 비밀경찰(Recherchedienst)과 밀정의 감시를 받는 신세가 됩니다. 이제 어디를 가든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지요. 그리고 늘 그의 꼬리를 밟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는 앵무새를 훈련해, 경찰이 그의 집 문을 두드릴 때마다 “경찰이 떴다!”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그 앵무새는 그의 유일한 경고자이자 동지였고, 불안한 나날 속에서 소소한 평온을 가져다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경찰들은 앵무새의 목소리를 듣고 심기가 불편해졌고, 잔혹하게도 그 앵무새를 죽여버렸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와게는 건강까지 급격히 악화하였습니다. 평생을 배필 없이 독신으로 살던 그는 꿈에 그리던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하고 1938년 8월 17일 수라바야(Surabaya)에서 35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사후(死後) 정확히 7년이 지난 1945년 8월 17일에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가 남긴 인도네시아 라야가 연주됩니다. 와게는 1971년 국민 영웅(Pahlawan Nasional Indonesia)으로 추서되었고, 수라바야에는 그를 기리는 묘소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초상은 1999년에 발행된 5만 루피아 지폐에 도안으로 삽입되었습니다.



참고문헌:

Denny Sakrie. (2015). 100 Tahun Musik Indonesia(pp.4-6). GagasMedia https://books.google.co.id/books?id=l3zwBgAAQBAJ&printsec=frontcover&hl=id#v=onepage&q&f=false

Ricklefs, M. C. (2008). A History of Modern Indonesia Since c. 1200(p.233). Palgrave Macmillan.

Fadrik Aziz Firdausi. (2017년10월29일). Indonesia Raya Setelah Sumpah Pemuda. Historia. https://historia.id/politik/articles/indonesia-raya-setelah-sumpah-pemuda-P1BEg/page/1

Fadrik Aziz Firdausi

Museum Sumpa Pemuda. Biola WR Soepratman [사진]. Museum Sumpa Pemuda, Jakarta. https://museumsumpahpemuda.kemdikbud.go.id/koleksi/#uael-gallery-6 


2001년에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간행된 앤서니 후타바랏(Anthony C. Hutabarat)의 책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의 생애 이야기와 역사 바로잡기(Meluruskan sejarah dan riwayat hidup Wage Rudolf Soepratman)』를 토대로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의 생애를 재구성했습니다.

Biola W. R. Supratman Biola W. R. Suprat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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