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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의 시를... 그리고 책꽂이 앞에서 그녀의 책들을 찾는 시간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소설가이기 전 그녀는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이란 시는 창밖에 어스름이 깔리고 

밥을 앞에 두고 앉아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볼 때면 늘 떠오르는 시다.

주걱으로 밥을 퍼서 식탁으로 가져와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려면

혼자여야 가능하리라. 저녁을 차리는 여인들은 자기 밥그릇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걸 볼 여유가 없으니까.... 식탁 앞에서 종종걸음 치는 것이 어미들의 본능인지... 특성인지... 습관인지 모르지만... 어미로서 식탁에 앉은 나는 내 밥그릇에서 김이 몽글몽글 오르는 것을 바라보지 못한다.

.      


어느 늦은 겨울 저녁이었다.

모처럼 가족을 위해서가 아닌 혼자만을 위한 저녁을 준비할 때...

한강의 시를 떠올렸다.

시적화자처럼 눈처럼 새하얀 밥을 떠서 식탁 한가운데 두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단 위의 향불... 향이 붉게 타들어가면서 나는 연기처럼..

김이 사라진다. 어딘가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그 김이 사라진다는 것,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은 생의 불가역성을 생각하게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을까.

아무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더 많은 김들이.... 현재가... 그리고 밥그릇 안의 생이 날아가지 않도록

숟가락으로 밥알을 가득 담아 입을 벌린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밥알 속의 김들... 미처 새어 나오지 못한 김들의 아우성이 목구멍을 울린다     

그 겨울 저녁... 비로소 알았다.

오직 나 혼자만의 식탁에 앉아 늦은 저녁을 꾸역꾸역 먹고 있을 때...

뜨거운 밥을 삼킬 때 울컥하는 것은 바로 발화되지 못한 김들의 목소리 때문이라고...     


그녀의 시는 슴슴하다.

자극적인 조미료가 없는.... 언어유희도... 시를 읽는 이가 알아먹지 못하게 비틀어 놓는 불편함도 없다.

그녀의 시는 말 그대로 ‘밥의 맛’ 그대로다.

슴슴한 ..... 여백 같은 맛... 종이를 씹어먹는 맛 같은...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 알갱이의 맛 그대로.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직 젊은 작가의 수상이기에 앞으로 그녀가 쓸 작품들.... 그녀의 어깨가 무거워졌으리라.

아니 에르노의 소설과 루이즈 글릭의 시. 올가 토카르축의 소설과 산문

그녀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한강도 이제 그녀들의 대열에 올라섰다.

50대이기에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녀 문학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길 바란다. 거침없이 전진하는 걸음의 서막이기를.

    

어떤 문학 작품이든 호불호가 있기 마련이다.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 책꽂이 어딘가에 깊숙이 꽂아둔 ‘채식주의자’를 책상에 꺼내놓는 아침이다.

그것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다.

올 가을, 그녀의 책들을 다시 읽으려 한다.

그 책을 처음 읽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졌을 테니까../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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