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이처럼 사소한 것들 (Small Things Like These)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그리고 메리 매케이 선생님에게
이처럼 사소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클레어 키건의 전작 『맡겨진 소녀』 이후 11년 만에 출간되어 키건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고, 같은 해 오웰상, 케리그룹 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었으며, 특히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아름답고 명료하며 실리적인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 책은, 자신이 속한 사회 공동체의 은밀한 공모를 발견하고 자칫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의 내면을 그린 작품이다. 키건 특유의 섬세한 관찰과 정교한 문체로 한 인간의 도덕적 동요와 내적 갈등, 실존적 고민을 치밀하게 담아냈다.
이 소설은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허구입니다. 1996년에야 아일랜드의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았습니다. 이 시설에서 은폐·감금·강제 노역을 당한 여성과 아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적게 잡으면 만 명이고, 3만 명이 더 정확한 수치일 것입니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Barrow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사람들은 침울했지만 그럭저럭 날씨를 견뎠다. 상점 주인, 기술자, 우편 업무를 보거나 실업 급여를 타려고 줄을 선 사람들, 우시장, 커피숍, 슈퍼마켓, 빙고 홀, 술집, 튀김 가에 있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추위에 대해 또 비에 대해 한 마디씩 하며 서로 이게 무슨 의미냐고ㅡ이 날씨가 어떤 조짐은 아니냐고-아니 또 이렇게 매운 날이 닥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학교로 갔고 엄마들은 고개를 숙이고 빨랫줄로 달려가는 데 이제 익숙해졌거나 아니면 아예 빨래를 내다 걸 생각조차안 했고 해지기 전에 셔츠 한 장이라도 말릴 수 있으리란 기대도 안 했다. 그러다가 밤이 왔고 다시 서리가 내렸고 한기가 칼날처럼 문 아래 틈으로 스며들어, 그럼에도 묵주기도를 올리려고 무릎 꿇은 이들의 무릎을 할퀴었다.
˝헐벗다’, ‘벗기다 ‘, ‘가라앉다 ‘,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 ‘ 등의 단어를 써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가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암시를 의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는 좋은 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 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빈주먹만도 못했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펄롱의 엄마는 열여섯 살 때 미시즈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했다. 미시즈 윌슨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시내에서 몇 마일 떨어진 큰 집에 혼자 사는 개신교도였다. 펄롱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엄마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그 집에 지내며 일할 수 있게 해 줬다. 펄롱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농장일꾼 네드의 조용한 관심아래.. 자라면서 학교에서 펄롱은 비웃음과 놀림을 당했지만 기술학교 졸업 후 석탄 야적장에서 일했다. 아내 아일린과 결혼하여 다섯 명의 딸과 함께 시내에 산다, 뇌출혈로 갑자기 죽은 어머니,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고 싶었으나 대답을 듣지 못했고 농장일꾼 네드는 미시즈 윌슨의 집에 초대된 손님들, 신분이 높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아버지 일 수 있다고 모호한 말을 한다.
뉴로스에서는 조선소가 문을 닫았고 강 건너에 있는 큰 비료 공장 앨버트로스에서는 여러 차례 해고를 단행했다. 베넷에서는 열한 명을 해고했고 아일린이 근무했던 아주 오래된 회사 그레이브스 앤드 컴퍼니도 문을 닫았다.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가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P. 44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중년에 접어든 펄롱은 창밖을 보며 버섯공장에서 일하던 때를 떠올린다. 최선을 다했어도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던 때, 잠시 멈춰 작업을 시작한 지점을 다시 돌아보았을 때 새끼버섯이 배양토를 뚫고 올라오는 걸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던 기억을...
12월, 까마귀의 달, 강 건너 수녀원을 맡아 관리하는 선한 목자 수녀회는 직업 여학교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수녀원에서 겸업하는 세탁소는 평판이 좋았다. 여러 소문이 있었다 수녀원에서 호출을 받아 15살 아이를 치료한 간호사는 빨래통 앞에 서서 너무 오래 일한 탓에 정맥류가 생긴 거라고도 했고 타락한 여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속죄의 의미로 세탁일을 시키는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일찍 펄롱이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을 때 불 켜진 작은 경당에서 여자아이들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한 아이가 다가와
“아저씨 우리를 도와주시겠어요?”
“강까지만 데려다주세요.”
“아저씨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일하다 죽을 때까지 일할게요.”
“집에 딸 다섯하고 아내가 있는데”
“ 저한테는 아무도 없어요.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 우리한테 씨팔 그것도 못해줘요.”
P. 53
펄롱은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닫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으며 최고 속도로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바닥에서 기어 다니며 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또 수녀를 따라 예배당에서 나올 때 과수원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는 사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이 죽 박혀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 수녀가 석탄 대금을 치르러 잠깐 나오면서도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던 것도 안개가 여기저기 기운 기다란 천 모양으로 내려앉았다.
P. 54
구불구불한 도로에 차를 돌릴 만한 공간이 없어서 펄롱은 우회전을 해서 샛길로 들어갔다. 그 길로 가다가 또 우회전했더니 길이 더 좁아졌다. 또 한 번 우회전을 해서 전에 지나간 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은 건초 창고를 지나다가 짧은 목끈을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 숫염소 한 마리를 보았고 곧이어 조끼를 입은 노인이 길가에 죽은 엉겅퀴를 낫으로 쳐내는 모습이 보였다.
펄롱은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가는 아침, 트럭 뒤쪽 판을 내리고 석탄 광 문을 열었다가 여자아이들 발견한다. 머리가 엉망으로 깎인,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모습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수녀원의 초인종을 눌렀다. 젊은 수녀가 벨 소리를 듣고 나왔다가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 아저씨, 내 아기 어떤지 물어봐 주시겠어요?”
“뭐라고?”
“배고플 텐데 누가 젖을 주죠?”
“14주 됐어요. 아기를 데려가버렸는데 만약 여기 있다면 다시 젖을 먹이게 해 줄지도 몰라요.”
수녀원장은 “네가 침대에 없는 걸 이제야 알았다, 경찰을 부르려던 참이야.”
.... 수녀원장과 차를 마시는 동안 여자아이는 블라우스와 카디건 주름치마를 입고 신발을 신고 다시 들어왔다. 석탄광에 갇혀있던 아이에게 배불리 먹이라고 수녀원장은 말했지만
여자아이의 식탁 앞애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네 이름은 뭐니?”
“세라, 레이먼드.”
“세라, 우리 어머니 이름하고 같구나.”
“내 이름은 빌 펄롱이고 부두 근처 석탄 야적장에서 일해, 무슨 일 있으면 나를 찾아오렴.”
현관 계단에 서 있는데 안에서 누군가 열쇠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펄롱은 억지로 자동차 키에 손을 뻗어 시동을 걸었다. 다시 길로 나와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를 생각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ㅡ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미사는 길게 느껴졌다. 펄롱은 딱히 열심히 참여하지 않고 멍하니 한 귀로 들으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보았다. 강론 동안에는 눈으로 십자가의 길」 성화를 훑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성모와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만나고, 두 번 넘어지고 옷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무덤에 묻히는 그림들 축성이 끝나고 앞으로 나가 영성체를 받아야 할 때가 되었으나 펄롱은 벽에 붙어 서서 고집스럽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펄롱은 누군가 자신이 농장일꾼 네드와 몹시 닮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네드에 대해 생각한다.
네드가 아버지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것이다.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 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크리스마스이브, 눈이 내리는 날, 스태퍼드 상점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장난감을 구경하다가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로 꼭 받고 싶었던 농장이 그려진 500피스짜리 지그소 퍼즐이 있는지 묻는다. 그렇게 어려운 지그소 퍼즐은 판매하지 않는다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고, 핸러핸 가게에서 아이린에게 주문한 에나멜가죽 구두를 찾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어두워져 있었다. 아일린은 자정미사 준비를 하며 펄롱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거였다. 펄롱의 하루는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배로 강을 바라보았다. 오래전 수도사들이 강가에 수도원을 세우고 강 통행세를 받던 시절, 사람들이 과도한 통행세에 분노하여 수도사들을 쫓아냈을 때 수도원장은 떠나면서 마을에 저주를 내렸다. 그 후 강이 해마다 딱 세 사람의 목숨을 가져간다고 했다.
펄롱은 다시 수녀원으로 가서 두려움에 떨며 석탄광 빗장을 연다. 아이가 갇혀있었다.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아이를 데리고 진입로를 따라 나와 덕을 내려가 부잣집들을 지나 다리를 향해 갔다. 강을 건널 때 검게 흘러가는 흑맥주처럼 짙은 물에 다시 시선이 갔다. 배로 강이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외투가 없어서 추위가 더 선뜩했다. 펄롱은 자기 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느꼈고 다시 한번 아이를 사제관으로 데려갈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펄롱이 데리고 가는 신발을 신지 않은 더러운 여자아이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 외면했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ㅡ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 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 120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P. 121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도, 어쩌면 이렇듯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120쪽)의 이야기이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언어가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구조물인 것처럼 소설 속에 묘사된 세계도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위태롭다. 1985년 아일랜드 작은 도시에 사는 빌 펄롱 같은 사람들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24) 살아야지,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 (22쪽).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틸 수 있으면 다행이고, 조금이라도 남겨서 앞날의 재앙에 대비할 수 있으면 기적이다. 다른 사람에게 동전 한 닢, 마음 한편이라도 내주는 것도 사치인지 모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말까지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고 아일랜드 정부에서 지원한 같은 이름과 명분의 여러 시설 가운데 하나다. ‘타락한 여성’들을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했으나, 성매매여성, 혼외 임신을 한 여성, 고아, 학대 피해자, 정신이상자, 성적으로 방종하다고 평판이 있는 여성, 심지어 외모가 아름다워서 남자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는 젊은 여성까지 마구잡이로 이곳에 수용했고 교회의 묵인하에 착취했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빌 펄롱의 내면에도 차마 하지 못한 사소한 일들, 쉽사리 입 밖에 내지 못한 모호한 말들이 꽉 차서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지경이다. 수녀원으로 대표되는 세상은 너무 크고, 그 안의 어떤 존재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가 너무 작은 존재라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펄롱에게 뒤에서 작고 소박한 사랑밖에 줄 수 없었던 네드처럼, 겉으로 드러난 것은 보잘것없지만, 화려하거나 열렬하거나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클 수 있다는 것을, 클레어 키건의 조용한 글이 낮은 소리로 들려준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역자의 말 중에서 -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라니. 사소하지 않았고 읽는 내내 마음이 내려앉았다. 세상 속 사소하고 작은 일들이 뭉쳐 크고 어렵고 무거운 것들을 만들어 낸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내 삶에 개입되면 사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내 능력밖의 일이라면 더욱 힘들어진다.
아일랜드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허구의 인물들의 이야기지만
충분히 있을법한, 있을 수 있는,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불운의 출입구를 지나 본 이는 안다
안락과 몰락을 가르는 것은 더없이 연약한 경계임을
- 신형철 문학평론가 -
올해 최고의 소설이라거나 전서점 소설 1위라는 선전에 현혹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이 주는 울림 때문에 책을 구입했지만 이 책을 꼭 사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신문, 출판사 광고에는 못 미치는 느낌을 받았다.
소외된 이들을 보듬는 이들은 소외되지 않은 이, 한 번도 소외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이 아니라 소외된, 한때 소외의 터널을 혹독하게 거쳐온 이들이다.
빌 펄롱 또한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소외의 늪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곁을 내어준 이, 내치지 않고 돌보아 준 그녀 덕분에 한 가정의 아빠이자, 남편으로, 직장인으로 제 몫을 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석탄광에 갇힌 아이... 맨발, 아무렇게나 잘린 머리칼, 더러운 옷, 옷 위로 아기에게 주어야 할 젖이 배어 나오는 어린 소녀를 거두어 집을 향한다.
아내와 아이들의 반응, 이웃의 반응, 수녀원의 반응을 감당할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미 그 버려진 소녀의 손을 잡고 집을 향하고 있다. 그와 더러운 소녀를 바라보는 행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끼면서도 가슴은 거룩함으로 타오른다. 오래전 16세 미혼모인 어머니를 구원한 미시즈 윌슨을 기억하며...
곁을 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사소한(?)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의 발걸음은 가볍다.
결국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사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