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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작가 스웨덴 한림원 강연에서...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이렇게 아름다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 올해는 작가 활동한 지 꼭 31년 되는 겨울이다.      

한 작가는 7일 오후 5시(현지시각, 한국시각 8일 오전 1시) 스웨덴 스톡홀름 스웨덴 한림원에서 열린 노벨문학상 수상자 강연(2024 Nobel Prize lecture in literature)을 했다

아름답고 절절하고 인간적인 그녀의 기록들을 일부 발췌하여 옮긴다.

     

그녀의 강력한 메시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면서도 이토록 아름다운가...

폭력과 아름다움의 공존, 모순적인 공존 속에 우리는 살아간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그녀의 질문은 어느 특정한 순간을 계기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하다. 과거는 이미 죽어버린 것이 아니다. 끝없이 살아 우리의 현재에 개입한다.

죽은 자는 이미 사라진 자, 이미 폐기된 자가 아니다. 서류상 소멸일 뿐 죽은 자는 끝없이 살아 ‘산 자’를 구원하려 한다.     ㅓ


그녀는 장편소설을 쓸 때마다 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질문들을 견디며 그 질문들 안에 산다. 그 질문들의 끝에 다다를 때-대답을 찾아낼 때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그 소설을 시작하던 시점과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변형된 상태에서 다시 출발한다. 다음의 질문들이 사슬처럼, 또는 도미노처럼 포개어지고 이어지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게 된다.          


세 번째 장편소설인 '채식주의자'를 쓰던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그렇게 몇 개의 고통스러운 질문들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그녀의 대답은 

끝없이 마무리되지 못한 질문 선 상에 놓여있다고... 

타오르는 초록의 불꽃같은 나무들 사이로 구급차는 달리고, 깨어 있는 언니는 뚫어지게 창밖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이 소설 전체가 그렇게 질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응시하고 저항하며. 대답을 기다리며.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간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나는 질문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섯 번째 장편소설인 '희랍어 시간'은 그 질문에서 다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영원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의 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연한 부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묻고 싶었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제목을 짓고 앞의 20페이지 정도까지 쓰다 멈춘 것은, 그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러니까 2012년 봄, '삶을 껴안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을 쓰려고 애쓰던 어느 날, 한 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내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광주가 하나의 겹이 되는 소설이 아니라, 정면으로 광주를 다루는 소설을 쓰겠다고. 900여 명의 증언을 모은 책을 구해, 약 한 달에 걸쳐 매일 아홉 시간씩 읽어 완독 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 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완성의 시점들을 예측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내가 그렇게 멀리 가는 동안, 비록 내가 썼으나 독자적인 생명을 지니게 된 나의 책들도 자신들의 운명에 따라 여행을 할 것이다. 

<한강 스웨덴 한림원 노벨상 수상 작가 강연 내용 부분 발췌>


'소년이 온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은 특정도시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 명사가 된다.

  

온다... 끝없이... 온다.

발을 딛고 사는 현재가 이미 폐기된 과거를 끌고 오는 것보다는

이미 폐기된 과거가 역사를 증언하며,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비루하고 비겁한 현재로 걸어온다.

주민등록상 이미 정리된 자들이 지금 살아있는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고개를 쳐들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세상은 고통스럽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름다워야 하지 않은가라고

끝없이 목소리를 내면서....


한강 작가는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그렇게 느리게 그러나 끝없이 쓰겠다는 다짐으로 연설을 마무리하였다.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그러나 강하고 서늘한 그녀의 발걸음을 응원한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4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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