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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있다.헤르만헤세

그 모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아픔에도 나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 

    

<가지치기를 한 떡갈나무>

    

나무여, 이렇게 잘려 나간 모습이라니,

이렇게 기이하고 낯설게 서 있는 모습이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내 속에 반항과 의지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나는 너와 같다. 고통스럽게 베어지는

삶을 끝내지 못했고

날마다 야만의 고통을 견뎌 내며

또다시 저 빛 속으로 얼굴을 내민다.

내 안의 연약하고 부드러웠던 것을

세상은 죽도록 조롱했지만,

내 본질은 파괴될 수 없는 것.

나는 만족하고 화해하며

가지를 수백 번 찢어 참을성 있게

새로운 잎을 틔워 내고,

그 모든 아픔에도 나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     

1919년 7월 헤르만 헤세          


 1919년 7월 가지치기를 한 나무를 바라보며 헤세는 말한다

“그 모든 아픔에도 나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라고...

헤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진지하고 중요하고 진기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고 오직 단 한 번만 그렇게 교차되는 점’으로 여기고 있다.     


겨울나무를 본다. 모든 아픔에도 고요히... 

기이하고 낯선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채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거대한 하늘에 손을 뻗어 쩍쩍 금을 내며

더 이상 기대할 것도, 포기할 것도 없는 겨울의 한 복판에서..

야만의 고통을 견뎌내며.... 

자기 안의 가장 연약하고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세상은 나방처럼 밝음을 향해 끝없이 질주하지만 

살다 보면 그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리하여도 삶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나무는 이미 알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파괴되지 않는 것은 부드럽고 연약하고 바스러질 것 같은 생의 본질이라는 것을...

수없이 비우고, 던지고, 버려지고 잘려나가도...

다시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것을 나무는 이미 안다.

모욕의 지점으로부터

패배와 절망의 지점으로부터

실망과 치욕, 슬픔의 지점으로부터

다시 손을 뻗어 일어나면 된다는 것을 

겨울나무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너와 같다. 고통스럽게 베어지는 

삶을 끝내지 못하고

날마다 야만의 고통을 견뎌 내며

또다시 저 빛 속으로 얼굴을 내민다.

내 안의 연약하고 부드러웠던 것을

세상은 죽도록 조롱했지만.

.....

나는 만족하고 화해하며.

가지를 수백 번 찢어 참을성 있게     

......

그 모든 아픔에도 나는 여전히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     


밤새 약간의 눈발이 날렸다.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또다시 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들

바람이 나무의 몸을 붙잡고 마구 뒤흔들어도

기어이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가고야 마는 거룩한 탄력을 바라본다.          

세상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약하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들을 끝없이 조롱한다. 야만스럽게...

그러나.... 1919년의 헤세처럼... 1919년 7월 가지치기를 당한 나무처럼... 그리고 2024년 12월의 나무처럼

우리는 

그 모든 아픔에도

이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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