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일
Bottari 작가 그리고 바늘 여인 김수자
"아티스트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게 아티스트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
"보따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제 주위에도 항상 있었습니다. 그 작업을 하기 전부터 제 화실에도 있었고요.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992년 P.S.1 작업실에서 작업하던 중 우연히 고개를 돌린 순간 거기에 보따리가 보였습니다. 천 작업을 하려고 보따리에 쌓아 놓았던 것을 제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 보따리는 전혀 새로운 보따리였습니다.”
보따리 Bottari 작가, 바늘 여인, 김수자 (1957-)
1957년 대구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에꼴 보자르에서 공부하였다. 캔버스의 새로운 해석에 대해 고민하였는데 80년대 중반 어머니와 같이 이불보를 꿰매던 중, 늘 자신과 함께 해 온 소재인 천과 바늘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여성의 가사 노동의 상징이던 ‘바느질’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일. 붓과 캔버스로 한정된 세계를 바늘과 실, 천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평면이었던 ‘천’이 바늘과 실을 만나 입체의 몸을 얻게 된다.
90년대 초, 뉴욕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위해 쌓아두었던 헌 옷 보따리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의 재발견. 사소한 것을 의미 있게 바라본 것이다.
이후 예술가 김수자를 가리키는 명칭은 ‘바늘 여인’ 혹은 ‘보따리 작가’로 확고해진다.
단순히 잇고 꿰매기에서 벗어나 보따리를 싸고 묶고, 풀고, 다시 싸서 묶는 행위를 통해는 보따리를 삶의 오브제로 승화시킨다. 김수자의 손을 통해 보따리의 가치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에서 벗어나 ‘보따리’ 자체로서의 존재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불보라는 평면은 타자이고, 바늘은 몸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타자와 나를 끊임없이 잇고자 함. 그런 것들이 결국 바늘로 꿰매는 행위예요. 이불보는 우리가 태어나고 사랑하고 고통하고 죽어가는 장소지요. 그것은 곧 우리 몸과 삶의 터 (FRAME)니까요.” 김수자
김수자는 보따리를 헌 옷과 헌 이불보를 이용하여 제작한다.
하나의 천 대신 굳이 현란한 색상의 이불보를 이용하여 보따리를 만드는 것은 김수자 작가가 이불보를 “태어나고 죽는 장소, 인생의 근원적인 장”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 밤과 환락, 성적인 모티브‘로서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전통 사회에서 은폐되고 억눌린 이불아래에서의 성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보따리” (2005)라는 작품은 traveling bag의 느낌으로 보따리가 바닥 여기저기 던져져 있다.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리라. 이동, 유목, 정착의 의미를 담고 있는 보따리는 사람의 희로애락을 상징한다. 순수하고 순결한 아기의 강보, 잠을 잘 때 사용하는 너무도 흔한 이불, 혼수로서의 이불, 병상에서 덮는 이불, 눈물을 감추는 이불, 망자가 되는 순간 몸 위에 씌워지는 이불....
이불을 다시 생각해 보면 ‘보따리’를 확장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듯싶다.
이불이라는 보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생의 시간이 들어있는가.
“연역적 오브제” (1997)라는 작품은 일본의 한 카페테리아의 식탁들을 강렬한 색의 이불보들로 덮은 하나의 설치 작업이다. 식당 테이블에 식탁보 대신 화려한 이불보를 씌어 놓았지만 손님들은 식탁보로 인식한다는 것에 착안한 작품이다. 잠자는 것과 먹는 행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 이불보는 용도에 따라 그 어떤 무엇이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늘과 보따리의 작업은 1990년대 후반부터는 퍼포먼스 방식으로 변모되었는데 1997년 형형색색의 보따리를 트럭에 싣고 작가 자신이 보따리 위에 앉아 전국을 돌아다니거나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이동한 퍼포먼스 기록물인 “보따리 트럭-2727킬로미터” (일부, 1997)이 대표적이다.
어린 시절 군인가족으로서 잦은 이사를 했던 어린 날의 기억에 모티브를 두고 있는 보따리 여행은 그녀 자신이 보따리의 일부 혹은 보따리가 되어 트럭을 타고 이동하면서 마주치는 시간과 공간을 연결해 주는 작업이다.
사실 김수자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 바늘 여인>이라는 아주 짧은 퍼포먼스 영상이었는데 1999-2001까지 델리, 상하이, 도쿄, 뉴욕 등에서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푸른 옷을 입은 그녀가 뒤돌아 서 있고 그녀 주위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영상이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의 등.
그녀의 얼굴을 관람객인 우리는 볼 수 없고,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이들만 볼 수 있다.
이상한 여자라는 생각을 하며 흘끔거리는 사람들의 표정. 수레나 자전거가 지나가도 비켜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자 황급히 방향을 트는 사람들의 모습. 스쳐 지나치고서도 다시 뒤돌아 보는 사람들. 그녀가 거리의 한 복판에서 서있어도 인물이 아닌 정물처럼 인식하고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그녀는 < 바늘 여인 >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을 ‘바늘’로 세상을 ‘천’으로 인식하고 낱낱의 것들. 흩어지는 것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세상에 고독하게 서 있다. 지도에 꽂힌 핀처럼 세상이라는 직물을 꿰매는 하나의 바늘.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면서 익명성의 인물로서
개별화, 타자화된 세계 속에 하나의 바늘로 서 있는 거리의 여자... 단절된 세상을 이어야 한다는 숭고한 목적을 지닌 여자.
“북적이는 거리 한 복판에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와중에도 한 사람이 움직임 없이 그대로 서 있다. 평범한 회색 재킷을 입고 검은 긴 생머리를 뒤로 묶은 그녀는 시끄럽고 다채로운 세상 속에 조용한 단색조로 끼어든다. 뒤에서만 보이는 그녀의 표정과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특색들은 숨겨져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행인들은 거리의 흐름을 거스르며 흔들림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어리둥절해하며 뒤돌아 쳐다보곤 한다. 대부분의 행인들은 그녀 주위로 단순히 밀려왔다 밀려간다. 김수자 작가는 ”한 개인이면서 하나의 추상이 되고, 특정한 여인이면서 모든 여인이 되고, 도구이면서 배우이고, 움직임 없는 상태이면서 목적 있는 상태로, 현존과 부재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
Nomadism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바늘 여인, 보따리 작가인 김수자는 안주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기존의 자기를 부정하고 기존의 틀을 부순다.. 그리고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
3월 둘째 날이다. 밤새 내린 비 때문이었는지, 안개가 가득했다.
도시의 새벽을 삼킨 히뿌연 안개, 우울과 고독을 삼킨 안갯속에.... 안갯속에 잠재된 것들을 생각했다.
거리의 바늘 여인처럼.... 익명성과 고유성을 모두 지닌 하나의 바늘이 되어
세상이라는 쉽지 않은 여백 속에... 나의 삶을 잘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잘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고... 정답도 없는 삶... 생각이 많아지는 3월이다.
바늘 여인처럼... 내 삶의 조각난 것들, 잊힌 것들, 무의미한 것들을 이어 다시 새롭게 탄생시키는 일 /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 12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