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의 나는 성인의 나이가 되면 자동으로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치 만 19세가 되면 무슨 마법에 걸려 주체적으로 내 삶을 개척해나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만 19세가 되던 해, 나는 어른의 마법엔 걸리지 못했고, 다만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내게 성인과 어른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사전적 정의는 잠시 넣어두고 두 단어가 주는 느낌을 설명하자면, 먼저 성인은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 될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반면에 어른은 그런 느낌이 아니다. 내가 '어른'이라는 단어에 가지고 있는 관념이 이미지로 머릿속에 박혀 있는데, 여태껏 그것을 언어화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전에는 우스갯소리로 (1) 운전을 할 수 있고, (2) 결혼을 했다면 어른이라고 했다. 나는 장롱면허가 있고 아직 결혼을 안 했으니 쿼터 어른인셈이다.
혈혈단신으로 타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나는 내가 당최 어른 같지 않다. 아무튼 성인이 아니라 어른만 술을 마실 수 있다면, 나는 술을 마실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근래에 '어른'에 대한 기준 하나를 발견한 것 같다.
이제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일년 정도가 지났는데, 요즘 내가 삶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나 혼자만으로도 벅찬 인생"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자"라는 고마운 제안이라던가 "이거 어떻게 하냐"라는 질문이라던가 "혹시 도와줄 수 있냐"라는 요청들이 벅차게 느껴질 때가 많다.
사실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거절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당치도 않은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남을 돕는데 시간을 쓰다가 정작 내 일을 몇 번 쳐내지 못하고 나서는, 그냥 거절하게 되었다. 전부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인지 계산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어릴 적 나는 새콤달콤을 살 때면 꼭 친구 몫을 사곤 했다. 그리고 마주치는 친구에게 하나를 주는 것이다. (자다가도 새콤달콤 사 왔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는 나에겐 새콤달콤을 건네는 행위가 엄청난 인류애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요즘은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람에게는 새콤달콤을 건네지 않는다. 무엇을 바라고 도와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가까운 친구가 도움을 청하면 정말 기쁘다. 생각해보면 가까운 친구들은 내가 도움을 청할 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줄 사람들이다. 내 기저에는 그런 계산이 깔려있는 것일까.
요즘은 더 시니컬한 사람이 된 것 같다. 내 기준 혼자만의 힘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을 내게 요청할 때면, 나는 거절한다. 근데 문득 이런 행동이 때론 내 마음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할 때 혼자만의 힘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는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요즘 느끼는 '어른'의 요소 중 하나는 관대한 마음으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려면 일단 본인의 삶에 여유가 깃들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을 갉아먹는 사람과의 관계에선 단호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도 너무 어렵다. 그러니 명철한 판단력도 갖춰야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