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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a 윤집궐중 Feb 09. 2022

43. 설날에서 정월 대보름까지

산수유 6_ [정원가의 열두 달]_ 카렐차페크

4. 이웃 사람들도 명백한 봄의 신호다. 그들이 삽과 가래, 가위와 새끼줄, 나무 도포제와 흙에 섞을 각종 가루를 들고 부산스레 정원을 오가기 시작하면 경험 많은 정원가들은 봄이 지척에 와 있구나 생각한다. 그도 낡은 바지를 찾아 입고 삽과 가래를 챙겨 서둘러 정원으로 나간다. 그럼 또 그의 모습을 보며 그의 이웃도 봄이 왔다는 걸 알게 되고, 서로서로 담장 너머로 기쁜 소식을 주고받는다.

[정원가의 열두 달]_카렐 차페크_정원가의 2월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은 설날 이후 처음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농경 생활을 했던 우리 조상들은 이 정월 대보름을 설날보다 더 성대하게 지냈다고 한다. 오곡밥, 약밥, 귀밝이술, 묵나물과 제철 생선 등을 먹고 여러 가지 행사와 다양한 놀이를 하며 한 해의 건강과 소원을 빌었던 이 명절은, 실질적으로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설에서 정월 대보름에 이르기까지의 15일 동안은 빚 독촉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축제 기간이었다. 이 축제 기간 동안 사람들은 세배를 다니고, 사람들과 어울려 농한기를 즐기고, 한 해의 농사를 준비했다. 정월 대보름에 일년의 농사 계획을 세웠다고 하니 한 해의 첫 달이 차오르는 이 보름 동안의 '쉼'은 마음이 차오르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카렐 차페크는 2월을 '낮에는 꽃망울을 덤불 밖으로 살살 꼬여내어선 밤이 되면 얼려 죽이는, 땅은 풀렸지만 아직 새싹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달이라고 묘사하면서, '정원가들이 봄의 첫 신호를 찾아 헤매는 달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원가들이 봄의 신호로 여기는 목록 네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가운데 4번째가 '이웃 사람들'이다.


얼마전에 <초등고전읽기 연구회> 멤버들을 줌에서 만났다. 2022학년도 계획을 세우기 위한 첫 만남이었는데, 아직 몇 학년 담임을 맡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세부 계획은 다음으로 미루고 큰 틀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학급에서 했던 것들, 개선하고 싶은 포인트, 올해 해보려고 구상중인 것들을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다 보니 봄기운이 느껴졌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 사이로 설렘이 스며들었다.


8살에 국민학교를 입학한 이후 해마다 3월이면 학교에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 어느 해부터 학생에서 교사로 입장만 바뀌었을 뿐, 늘 '같은 일',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는 것보다 새로워지는 것이 더 많은 일을 평생 하고 있다. 그해 만나게 되는 학생들, 동학년 교사들 따라 다른 빛깔을 가진 한 해를 보내고 헤어진다. 그리고 3월이면 다시 시작한다. 초임 시절에는 1년이라는 기간이 뭘 해보기에 너무 짧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서 최소한 2년은 연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이젠 열두달이라는 리듬이 좋다. 공들이기에도, 내려놓기에도.


오늘 오후에 '인사자문위원회'가 열린다. 우리 학교 일년 농사가 달린 '담임 및 업무인력 배정'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길, 그래서 정월대보름에 한 해를 힘차게 시작했던 우리 조상들처럼 우리도 신나게 시작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과연 희망한 학년과 업무를 맡게 될까?)


내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부단히 깨우쳐 주는 나의 손바닥만한 정원, 교실을 생각한다. 올해 나는 그 곳에 어떤 꽃들을 심게 될까? 그곳에 어떤 벌과 나비가 날아올까? 또 어떤 '지랄맞은' 일들과 사투를 벌이게 될까? 오늘 학년과 업무가 정해지면 보다 구체적인 일 년 농사 계획을 세울 수 있으리란 생각에 마음이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다.'


오늘 10시에 예약해 둔 헤어샵 알람 문자가 도착해 있다. 오늘 오전 스케줄은 보름달이 차오르는 동안 자라난 '은발 염색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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