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 후반의 회사원, 정확히는 20대 싱글 여자 신입사원의 출퇴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하며 신입사원 시절 소소한 기억을 공유해보려 한다.
새벽 6시 38분, 통근버스
내가 하필이면 그 대기업의 그 계열사를 선택하여 지원한 가장 큰 이유는 통근거리였다. 후에 이 이야기를 선배들에게 하니 무척 어처구니없어했다. 지금의 나였어도 그랬으리라. 그러나 초, 중, 고, 대학교를 모두 멀리 통학한 나에게 거리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이슈였다. 참, 대학원은 서울에서 8천 킬로미터 떨어진 시드니로 갔었지.
아무튼 당시 시청역 근처에 위치한 회사의 위치는 나에겐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매일 새벽 통근버스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역곡역 근처 통근버스 승차 포인트엔 어느새 계열사 직원들로 꽉 차곤 했다. 출근길 서울 도심의 교통 혼잡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새벽 6시 38분에 버스를 탔다. 아침 9시 출근인 것을 감안하면 꽤 이른 시간이긴 했다. 버스에 타는 직원들 대부분은 연차가 있어 보였고, 새벽 통근버스 안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내 이름을 반갑게 불러 뒤를 돌아보니 고등학교 동창이다. 다른 계열사에 입사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통근버스를 같이 탈 줄은 몰랐다. 얼굴만 알던 동창이라 서먹했지만, 우리는 이내 친해졌고 통근버스 안에서 꽃피는 신입사원들의 수다는 다른 직원들의 단잠을 방해했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통근버스에서 내려서 스타벅스에 들려 먹던 카페라테와 따뜻한 스콘. 여담이지만, 그 친구도 나처럼 퇴사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회사 도착시간 아침 7시 15분. 그냥 흘려 보내긴 아까운 시간. 부지런한 동기들은 사내에서 제공되는 어학 수업을 듣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했다. 내가 뭘 했는지 딱히 기억이 안나는 것을 보니 그냥 흘려보냈나 보다. 별것 없이 보내는 아침 시간이 싫어서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 일이 더 잦았다. 1호선 지옥철을 견뎌야 했지만, 먼 거리 통학에 익숙했던 내게 이 정도는 껌이었다. 다만, 직장인이 되고부터 자주 신었던 7cm 하이힐에 발이 좀 더 고생할 뿐이었다.
출퇴근 같이 하던 아빠와 딸
당시 우리 아빠의 직장은 시청역에 있었다. 부녀가 반경 200미터 안에서 근무했던 흔하지 않은 풍경. 아빠랑 딸이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던 그 길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대 어른들이 그렇듯, 표현에 인색한 아빠. 딸과 같이 함께하는 길이 좋으셨겠지만 애써 표현하진 않으셨다. 그래도 커피 좋아하는 딸내미 쪽쪽이 한잔(테이크아웃 커피의 우리 아빠식 표현) 사주며 흐뭇하게 걸어가던 아빠의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후에 내가 퇴사 후, 아빠는 출근길에 내 생각을 하셨을까?
익숙한 지하철 출퇴근 (출처: 위키백과)
회사 카페테리아, 사원증 목에 걸고
점심시간의 모습은 각 팀별로 사뭇 달랐다. '신사업 본부'라는 이름 때문이었을까?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우리 팀은 마음 맞는 직원들끼리 삼삼오오 근처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팀 전체가 같이 식사를 하는 날이면 거의 사내 카페테리아를 이용했던 기억이 난다. 이곳이 군대인가 싶게,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식사를 초스피드로 끝내는 상사들. 특히 팀장님의 식사속도를 맞추기 위해 부하 직원들은 눈치게임을 하며 숟가락을 욱여넣는다. 눈치 없는 혹은 없는 척하는 나란 신입사원도 밥이 코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부담스러운 시간이었다. 팀 전체 점심식사를 하면 좋은 이유 한 가지. 15분이면 식사가 모두 끝나서 각자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다른 팀에 있는 동기들을 찾아 쪼르르 달려가 이야기 꽃을 피우기도 했다.
참, 회사 카페테리아는 꽤 괜찮았다. 저렴한 가격에 이름도 담백하게 공제회관. 우리 회사 주변에 다른 계열사들도 몰려있어서 점심시간 카페테리아는 늘 붐볐다. 조금이라도 일찍 가서 줄을 서지 않으려는 노력은 막내인 내 담당이었다. 사원증을 식당 내 바코드에 찍으면 점심식사 결제 완료. 목에 달랑거리는 사원증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이내 익숙해졌고, 그 근방 대기업 직장인들은 사원증을 목에 걸고 점심시간에 으레 그렇게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 직장인이야. 나 이 회사 직원이야'라는 것을 말해주는 무언의 신분증 같았으니까. 대학시절엔 이런 모습조차도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칼퇴근. 그거 꼭 해야 하는 건데...
꿈의 6시 칼퇴근. 내 기억엔 거의 없다. 물론 자유로운 분위기의 우리 팀은 6시 30분 이전에 퇴근을 하는 아주 괜찮은 문화가 있었지만, 그것도 팀장님이 먼저 가시는 것을 눈치 보며 기다렸다. 아마 MZ세대들에겐 생경한 광경일 수도 있겠다. 좀 더 보수적인 분위기의 경영지원본부나 인사팀은 평균 퇴근 시간이 7시 이후였고 동기들 모임이라도 있는 저녁이면 나는 회사 근처에서 동기들을 기다리기도 했다.
덕수궁과 시청역 주변 (출처: 아시아경제) 시청역 9번 출구
집에 갈 땐 지하철을 이용했다. 1호선과 2호선 환승역이던 서울 시청역은 늘 복잡했다. 일찍 퇴근하는 날엔 친한 여자 동기들이 모여 저녁을 먹기도 했다. 축하할 일이 있으면 시청역 아웃백에 갔고, 남자 동기들이 많이 모이면 고깃집으로 몰려갔던 기억이 난다. 아담하지만 분위기 좋던 덕수궁 앞 파스타 집 아직도 있으려나. 거기서 남자 동기 한 명한테 고백도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리 동기들 30여 명 중 여자는 단 5명이라 공대 아름이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매달릴 땐 언제고 나보다 더 빨리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살더라는. 이제 다 추억이라 웃음이 난다. 조만간 시청역 덕수궁 돌담길을 한번 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