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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쿠쌤 Jun 14. 2021

일개 신입사원, 어느 날 영어면접관이 되다

그때 그 직장인 업무 일지

시작은 평범했다.

꽤 탄탄한 대기업의 신사업 본부 신입사원으로 배치되었다.

신입사원의 현업 배치는 개인의 의견과 회사의 방향이 맞아야 하는 것으로, 이 또한 고단한 프로세스다. 인기 있는 부서의 TO는 매우 부족하고, 신입사원이 가고 싶어 하는 부서는 특정적이니 말이다. 난 기업의 주력 부서 즉, 돈을 벌어다 주는 팀이 아닌 신사업 본부, 다시 말해, 투자하고 모험하며 어찌 보면 조직의 큰 관심이 없는 곳에 지원했다. 그래서인지 별 탈 없이 인사 배치가 마무리되었다. 다른 동기들이 신사업 본부를 기피(?)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연말 성과급' 때문이었다. 신사업은 말 그대로 아직 수익을 크게 창출하는 부서가 아니라서 평가에서 늘 밀렸다. 쉽게 말해 인사고과 평가 시, 바닥을 깔아준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사업 본부에 지원한 단 하나의 이유는, 왠지 영어를 많이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 난 영어를 참 좋아했고 기업에 들어가서 영어로 멋지게 마치 커리어 우먼이 된 듯이 업무를 해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그 길이 그렇게 다이내믹한지 그 당시엔 모른 채로.


열정 만수르 신입사원

대부분의 신입사원들이 그렇겠지만, 실력보다 의욕이 한참 앞선다. 회사와 팀의 분위기를 파악하며 업무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정신없는 나날들이 이어지기도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갓 학생티를 벗어난 사회 초년생은 풋풋했고 또 어설펐다. 회사에서 종이신문을 떡 하니 펼쳐놓고 읽다가 주의를 받기도 했고(신문을 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단 것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간다. 까라니 깔뿐), 영어를 잘 못하는 팀장님께 영어 전화를 연결시켜드려 당황하게 했던 일도 있다. 지금 생각하니 골 때리는 신입사원의 귀여운 추억이긴 하지만.


같은 팀에 배치되었던 두 살 많은 남자 동기는 그야말로 군기가 가득 들어간 FM의 정석을 보여줬다. 매일 1시간 일찍 출근을 하고, 야근에, 흡연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 상사들의 스모킹 타임에 늘 끼어서 수발을 들기도 했다. 참고로 회사의 중요한 이야기는 이 스모킹 타임 즉 담배 피우는 시간에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꼭 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래서일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마인드의 나는 일만 잘하는 아웃사이더 느낌이 컸다. 다행히 회사는 신입사원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저 조직에 있어주는 것이 미래를 위해 고마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밥값(?)을 하는 그날까지 조직에 순응하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회사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리라.



국내파 신입사원, 영어면접관이 되다

앞서 언급했듯, 영어를 참 좋아했던 나는 영어 전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강점으로 특화시켜 갔다. 어학연수 경험도 없던 나였지만, 영어에 대한 관심과 끈기로 점차 실력을 높여갔고 회사에서 영어 관련 업무에 직접 투입되면서 더욱 열심히 영어실력을 쌓아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장 업무를 처리해야 했으니까. 당시에는 압박을 느끼며 영어공부를 했지만, 지나고 나니 고마운 순간들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영어공부 이야기는, 순수 국내파 그녀는 어떻게 호주 명문대를 갈 수 있었나 를 참고하시길)


나에겐 점차 '영어 잘하는 신입사원'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났고, 이를 눈여겨보던 인사팀에서는 나를 영어면접관 중 한 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입사 1년 차가 다음 기수 신입사원의 영어면접을 평가하게 되다니. 물론 정식 면접관이 아니라 일종의 부 면접관의 자격으로 가서 평가의견을 내는 역할이었지만, 황송하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당시 회사의 주력 사업이 국내에 치중해 있어서 영어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회사의 특성상 가능하기도 한 일이었다. 다른 말로, 운이 좋았었다.



신입사원, 회사의 통역 업무를 맡다

해외 영업 파트에 있던 고로,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했던 사수를 만나 업무와 언어 습득이라는 이중고(?)를 체험하며 하루하루 성장해 나갔던 신입사원 시절, 영어로 진행하는 회사 소개 프레젠테이션이나 간단한 통역업무는 내 루틴처럼 되어갔다. 프랑스, 홍콩, 베트남, 이스라엘 등 세계 각국의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이메일과 전화로 업무를 처리하고 대면 미팅에서는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맡아하기도 했다. 우리말 프레젠테이션도 부담인데, 그것을 영어로 진행하려니 발표 전날부터 굉장히 긴장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팀의 특성상 이런 업무는 당연한 것이었고, 추가로 내게 맡겨진 업무가 하나 더 있었으니 회사 1층 쇼룸의 영어 가이드였다.


회사 1층 로비에는 깔끔하게 잘 꾸며진 쇼룸이 있었는데, 회사의 제품을 전시하며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의 추가 업무는 외국에서 온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영어로 쇼룸 투어를 진행하는 일이었다. 상시 근무하는 모델 같은 쇼룸 투어가이드(내 기억엔 계약직 도우미)가 있었으나 영어는 안 되는 관계로 내가 그때그때 불려 갔다. 영어로 쭉 설명만 이어나가면 10분 정도면 끝나는 짧은 투어이지만, 관람객들의 반응에 따라 더 긴 설명이 필요로 한 경우도 있어 진땀을 빼기도 했다.

조직과 업무에 적응하던 신입사원 시절이 떠오르는 사진

그리고 정확히 그 시점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속한 이 회사가 나를 담기에는 좀 작은 것 같아. 더 넓은 물로 나아가 보겠어'라는 자만심 혹은 자신감 넘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 때가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 스텝은 호주 대학원 유학이라는 어마어마한 결단이었지만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없었다는 것을 밝혀두고자 한다. 역시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더라. (이에 관해서는, '멀쩡히 다니던 대기업 퇴사 이유와 유학 결심'을 참고하시길)


결과적으로 무척 특이하게도, 내 경우에는 회사에 들어오고부터 영어실력이 급격히 늘게 되었다. 이유는 단연코 '절박함'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절박한 순간을 헤쳐나가기 위해 기른 나의 영어 덕분에 호주 유학이라는 큰 변화에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지금도, 나는 영어와 뗼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을.


자신감과 열정이 넘치던 그때 그 신입사원이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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