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각도 1: 표현의 자유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언어에 대해 발생할 수 있는 의문을 먼저 해명하고자 한다. 그 의문은 바로
"왜 언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브런치 북의 제목이 "가볍게 지나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인 만큼 이 문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언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언어학에서 꾸준히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논쟁이 끝나질 않고 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대다수의 언어학자들은 언어를 의사소통의 상위단계로 정의한다. 즉, 언어의 목적이 주로 의사소통일 뿐, 의사소통이 곧 언어라는 의미는 아니며, 의사소통의 하위단계인 문자는 더더욱 언어로 보기가 어렵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언어의 목적 중 하나가 의사소통이고,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로써 문자가 사용된다는 것이다. 즉, 언어와 문자는 이렇듯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더욱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이 에피소드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자.
나는 언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물론 수많은 동물들도 저마다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침팬지는 수화를 배워서 3~5세 인간 아이 수준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들이다. 혹은 돌고래들은 각 무리마다 쓰는 언어가 다르며 심지어는 방언까지도 있다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조그만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인간의 언어가 그들의 것과는 궤를 달리 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험에서 동물들은 그저 특정 손동작(수어의 경우)과 뜻을 암기한 것에 가깝다. 이건 인간의 언어를 이해했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강아지가 주인이 "간식"이라고 말하면 곧 간식을 먹게 된다는 사실을 암기한 것에 가까운 수준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문장의 구성요소인 구 조차도 만들지 못했으며, 시제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수준이다. 동물들이 나름 그들만의 의사소통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나, 그것이 과연 인간의 언어에 가까운 수준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히 인간을 다른 동물과 차별화시킨다는 점 말고도 우리의 사고과정을 돕는다는 점에서 가장 인간스러운 특징이 된다. 언어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말 중에,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다.
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
라는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명언이 있다. 이 말의 요지를 간직하고 문장을 조금만 변형시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생각의 한계다.
비록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이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생각일수록 언어의 사용은 필수가 된다. 복잡한 사고의 흐름과 개념들을 문법과 문장의 형태로 질서 정연하게 정리를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복잡한 사고에 큰 도움을 준다.
앞으로도 계속 다루겠지만 언어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정말 우리 생각보다 훨씬 지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곧 생각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독재자가 등장하면 늘 나타나는 패턴 중에 하나가 언어의 제한을 만드는 것이다.
특정 단어만 사용하도록, 혹은 특정 단어를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제한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언어를 통제함으로써 대중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잘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그 어느 때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뭐, 여기까지는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해보자.
"일본의 식민지배와 조선인 탄압은 정당했다"라고 누군가 주장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대부분의 경우 벌써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사실은 이보다 훨씬 더 여러분을 불편하게 만들 문장들이 많다. 다만 그저 내가 그만큼의 용기가 없을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표현들도 표현의 자유로써 보호되어야 할까?
표현의 자유로써 보호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그래.. 넌 그렇게 말해라. 난 신경 안 쓸란다."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학생을 가르치는 대학교의 교수 중 한 명이 저런 발언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표현의 자유로 보호된다면 이 교수는 학교 내에서 어떠한 제재를 받아서도 안된다. 학교에서 쫓아낼 수도 없다. 자, 그래도 여전히 보호받아야 할까?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마음으로는 안될 것이다. 이건 표현의 자유고 자시고 명백히 거짓이고 정의롭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 실제로 비슷한 사례가 있다. 프랑스의 리옹 대학교의 로베르 포리송 교수는 "나치의 유대인 가스실 학살은 없었다."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당연히 이 주장으로 난리가 났고 결국 포리송 교수는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더욱 이슈가 된 것은 포리송은 노암 촘스키에게 표현의 자유를 옹호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요청했고, 촘스키가 이에 서명을 했기 때문이다.
노암 촘스키는 20세기 최고의 지성이자 석학이며 언어학에서는 그냥 GOAT (Great of all time)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이에 촘스키의 명성은 한때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촘스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거듭 말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촘스키가 포리송의 주장에 동조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주장이 아무리 터무니없고 불쾌하다고 해도 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촘스키는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표현의 자유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까? 20세기 최고의 언어학자 촘스키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밖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동시에 우리가 고차원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이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다면 누군가의 언어를 제한한다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든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대해 그 어떠한 일례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를 수용하기 시작하면 오랜 시간 흐른 뒤에는 결국 꽤 많은 것까지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말이 안 되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부도덕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까지 해서 지킨 표현의 자유라는 완고한 성이 결국 정말 위기의 순간에 우리 모두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도구이다. 만일 인간이 필요 없고 명령에 따르는 가축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리에게서 먼저 언어를 빼앗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