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각도 3: 우아한 언어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에는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그의 수사학 선생인 프론토가 보낸 편지의 내용이 실려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어떤 이로운 학문의 위안으로 자신을 달래었습니까? 동의어들을 모으고, 가끔은 뛰어난 단어를 찾아내며, 고대인들의 문장 구조들을 변경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습니까? 저속한 것들을 우아함으로, 더럽혀진 것들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고, 어떤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형상을 잡아채고, 고대의 단어로 장식하고, 오래된 색을 덧칠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까?"
저번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언어의 변화에 대해 다뤘다. 요약하자면 언어는 늘 변화하고 더 편리해지는 방식 즉, 대개의 경우 축약이 되는 줄임말과 같은 신조어로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기성세대가 불편해할 수 있지만 결코 막아서는 안 되는 자연스러운 변화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반대로 오래된 언어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언어는 오래 쓸수록, 그리고 많이 사용될수록 더러워진다. 저속해진다. 이게 무슨 말일까? 라틴어를 생각해 보자.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를 귀족 언어라고 생각했다. 성경도 라틴어로만 적혀 있었고 이를 대중 언어, 즉 독일어 등으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종교개혁"이라고 불릴 만큼 큰 움직임으로 불렸다.
라틴어는 기본적으로 사어다. 일상어가 라틴어인 나라는 지금도 그 당시에도 거의 없었다. 즉 라틴어는 많이 쓰이지 않은 언어였다. 그리고 오직 그 이유 때문에 라틴어는 상류층의 언어가 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라틴어의 위상이 얼마나 드높았는지 라틴계 언어가 아니라 게르만계열의 언어인 독일어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유럽에서 가장 열등한 언어로 대우받았을 정도다. 하물며 지금까지도 라틴어 기원의 영단어는 영어권 나라에서 고급 어휘로 취급받는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바로 한자다. 대체적으로 한자어가 우리말보다 고급 어휘로 취급된다. 달빛보다는 월광이, 뜨거움 보다는 열기, 새끼손가락보다는 소지가 더 고급어휘로 취급되는 것처럼 말이다.
라틴어를 사용했던 로마 제국의 커다란 뒷배경도 한몫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그것보다는 라틴어가 일상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류층 언어의 명맥을 이어나갔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언어의 우아함은 순전히 얼마나 사용되지 않는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유행어에 우아함을 느끼지 못한다. 저속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유행어는 말 그대로 크게 유행하여 사람들 입에서 수백, 수천번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 "더럽혀진" 언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글쓰기 수업에서 교수들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 "대중들이 모르는 단어로 잘난 체 하지 말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리해야 하는가? 내가 황홀함을 느낀 문학 작품들 중에서 사전을 찾아볼 필요도 없는 쉬운 단어들로만 적힌 작품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위대한 작품들 중 잘난 체 하지 않은 언어로 적힌 책들이 몇 권이나 있을까? 그 언어들은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그러면 우리는 그 고고한 자태에 빠져들게 된다.
이 모든 이야기가 허영으로 가득한 실용성 없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정말 중요하다. 이번 가볍게 지나친 보이지 않는 것:언어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곧 자신이 우아한 사람이 될지 저속한 사람이 될지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누가 신조어와 유행어를 남발하는 사람에게서 우아함과 고귀함을 찾을 수 있을까? 있던 우아함과 고귀함도 그의 더럽혀진 언어가 가려버릴 것이다.
우리가 오래된 단어를 다시 발굴해 내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더 정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신조어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저번 에피소드에서 이야기했다. 그런 경우 신조어는 현시대의 감정, 사고, 사상 등을 표현하기 적절한 언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언어가 변화하는 기준은 편리함에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뭉뚱그려 표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애통, 비감, 비애, 참담, 비탄, 애수는 점점 "슬픔"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지고 있다. 희열, 희락, 환의, 유열, 열락은 "기쁨"으로 뭉뜨그려지고 있다. 대표어휘 하나만을 남기도 세부적이고 디테일한 어휘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렇게 뭉뚱그려진 언어 속에서 나의 감정, 나의 상황, 나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을까? 이렇게 막연한 표현들 속에서 우리가 과연 예리하게 튀어나와 독자들을 놀라게 하는 뛰어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독자를 놀라게 하고 싶다면 닳도록 쓰인 익숙한 언어로는 힘들다. 갑자기 쾅. 하고 망치로 찍어 내리듯 나타나 탁월하고 정확한 표현으로 독자를 당황시키고 유혹해야 한다.
그래서 일기에는 위안이 있는 것이다. 대게 일기를 쓸 때는 평소 친구들과 떠들 때 사용하는 대중어보단 조금 더 우아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밤, 홀로 책상에 앉아 평소에 쓰지 않는 어휘를 써가며 오늘 하루를 정리하다 보면 나의 감정과 상황, 그리고 정체성을 더 명료하게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라져 가는 언어에서 동의어를 찾아내고, 뛰어난 단어를 습득하여 우아한 언어를 얻어낸다면 손해 볼 건 정말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를 통해 얻어낼 것은 가치를 매길 수 조차 없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