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름답거나 선한 것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요즘 재미를 들인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소셜 미디어에서 본 것인데, 지브리 스튜디오의 『원령공주』의 명대사,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를 말하고 어리둥절하는 친구를 한참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넌… 죽어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웃자고 하는 실없는 말입니다만, 가만보면 생각보다 꽤 심오한 철학적 사유로 이어집니다.
인간은 인간의 눈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합니다. 한편, 추한 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파괴하려고도 하죠.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바퀴벌레를 죽이면 영웅이고, 나비를 죽이면 악인이다. 도덕의 기준은 미학적이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서는 이러한 문장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을 위해 죽는 일은 쉽지만, 비참한 것이나 부패한 것들을 위해 죽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저는 그날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동화책을 보아도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기사는 수두룩빽빽하지만 반대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에게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나도 모르게 더 친절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익충인 돈벌레를 발견하면 기겁을 하지만 산책 나온 강아지를 보면 미소가 지어집니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권위를 얻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가 어쩌면 인류사를 지금까지 이끌어 온 주된 동력이 아니었을까요? 아름다운 깨달음을 저장하고, 아름다운 자식을 돌보며, 아름다운 예술품을 보관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가며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그렇다면 추하고 못생긴 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죽어라, 그대는 못생겼다.”라며 소셜 미디어에서 우스갯소리처럼 돌아다니는 밈처럼 그들은 아름다운 존재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걸까요? 제가 위에서 인용한 엔도 슈사쿠의 문장 앞에 사실 중요한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름답거나 선한 것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위의 문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과 동치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는 아름다워질 것을 위해 죽었습니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진정으로 신경 써야 할 것은 이미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아름다워질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이는 단순히 문학적이고 듣기에만 좋은 말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주식을 생각해 봅시다. 이미 고평가된 주식보다는 곧 고평가를 받을 주식이 비교도 할 수 없이 가치 있지 않습니까? 이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진정 가치가 있는 주식을 찾아 투자하는 사람이 아주 소수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진정 가치 있는 것들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들으면 당연히 기쁘겠지만, 우리에게 진정으로 위로가 되는 말은 오히려 “살아라, 그대는 아름다워질 것이다.”일 겁니다. 반대로 우리도 이미 아름다운 것들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닌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나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 단점,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 미숙함, 불완전함 등이 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정말 수도 없이 많겠죠. 척 보기에는 아름다운 것들보다 훨씬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들 말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위대한 작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어느 날 한 신부를 만났습니다. 그의 묘사에 의하면 그 신부는 “몸이 뒤틀린 난쟁이” 같았다고 합니다. 그의 추함이 어느 정도였냐면, 프랑스는 며칠간 그 신부를 차마 정면에서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신부는 영혼의 신성한 솔직함과 섬세한 지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나톨 프랑스는 그의 “뒤틀린 난쟁이” 같은 육체에 “천사 같은 미소”가 지어지는 모습을 보며 측은함이 아닌 오히려 시기심까지 느낄 정도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회고했습니다.
제가 만일 저 신부의 입장이었다면 영혼의 신성함은커녕 자기혐오와 열등감에 찌들어 살았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 신부도 한때에는 그랬을 수도 있죠. 하지만 신부는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고통과 혐오만을 주는 육체를 이겨 낸 그의 정신은 무엇보다 더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습니다. 아나톨 프랑스가 시기할 정도의 아름다움입니다.
추함 안에는 종종 상상 이상으로 큰 가치가 숨어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작은 씨앗 안에 숨어 있듯 말입니다. 저는 그 추함 속에 잠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을 기르고 싶습니다.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리고 돌보면 씨앗에서 새싹이, 새싹에서 거대한 나무가 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름답거나 선한 것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다가 문장 수집 노트에 옮겨 적은 이 문장은 추한 것의 가치를 깨닫게 해줍니다. 신의 아들이 대신 죽어줄 정도의 가치입니다. 이 문장은 이렇게 외칩니다.
살아라, 그대는 아름다워질 것이다.
이 위로를 스스로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것은 이제 제 몫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