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에 바라보는 숲
노스텔지어, 고향이나 과거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슬픔을 뜻하는 향수
아네모이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절의 분위기와 문화 요소 등에 그리움을 느끼는 감정
제 문장 수집 노트에 수집한 문장 중 “세월을 눈앞을 수채화로 만들었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나온 문장입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본 적이 없지만 어디선가 이 문장을 주워 듣게 되었고 맘에 쏙 들어 그 자리에서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눈앞을 수채화로 만들기도 하지만, 또 우리의 기억을 수채화로 만들기도 합니다. 물에 희석되듯 세월에 희석된 기억은 실제보다 더욱 아름답게 남겨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채화처럼 그려진 기억을 되짚어 보며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 노스텔지어입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에는 이러한 문장도 있습니다.
추억은 아득히 멀어질수록 아름답지 않은가?
노스텔지어는 단순히 자신의 과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디지털인 지금, 반대로 모든 것이 아날로그였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심지어 본인이 살지도 않은 아주 오래전의 시기를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신경학자인 존 케닉은 이러한 현상을 아네모이아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있어 아네모이아는 아주 드문 현상입니다. 고대인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많지만 그들의 삶은 동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관찰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들의 삶을 직접 살고 싶지는 않죠. 그리고 앞으로 저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 줄 수많은 기술들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얼른 식사를 대체할 수 있는 알약을 누군가 발명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런 저에게도 과거, 게다가 되도록이면 아득히 멀어질수록 좋을 과거가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고요한 낮입니다. 고요한 낮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어질 정도입니다. “낮이 고요할 수 있나?” 하는 질문이 먼저 떠오릅니다. 마치 “달콤한 한약”같이 어색한 개념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모든 걸 주었고, 그 대가로 우리에게서 고요한 낮을 가져간 것입니다. 사람 떠드는 소리, 노랫소리, 호객 행위하는 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 특히 차 지나가는 소리.
어느 날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있는데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에 바라보는 숲은 유난히 아름답게 보였다.
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말이지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장 속 풍경을 재현해 보기 위해 이른 아침 산책로를 따라 숲으로 들어섰습니다. 물론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인구 밀도가 헤르만 헤세가 살던 독일의 작은 동네에 비하면 수십 배는 높을 이 도시에는 이른 아침에도 산책을 나오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차 소리는 나무가 막아 주지도 못합니다.
페르난두 페소아도 새벽 거리의 고요함을 찬양했던 걸 보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도 이미 웬만한 도시에서 고요한 낮은 사라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고요한 낮을 되찾기 위해선 얼마나 먼 시간여행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제가 상상하는 천국은 통상적인 인식과는 약간 다릅니다. 햇볕 따스한 들판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고 있는 이미지입니다. 배짱이 같은, 천국 치고는 약간 소박하고 유치할 수 있는 이 이미지는 몇 년 전부터 제 머릿속으로 들어와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듭니다.
어쩌면 이건 천국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라,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네모이아일 수도 있겠습니다. 매일 숲길을 걸으며 일상 속에서 고요한 낮을 즐겼을 한스에 대한 질투심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 세상에서 죽어 사라져 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고요한 낮에 대한 애도일 수도 있습니다.
산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에 바라보는 숲은 유난히 아름답게 보였다.
문장 수집 노트 속에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는 이 문장은 식사 대체용 알약을 기다리는 현대인에게 남겨 주는 마지막 과거에 대한 여운, 아네모이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