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엄마 얼굴
세 자매이신 엄마가 자매 계로 다녀온 여행만 해도 손가락 열 개가 다 꼽힐 것 같은데….
지나간 추억사진을 일일이 보고 고르고 편집해서 앨범 주문하기까지, 참 피곤할 것 같은 작업이 예상되어 못 들은 척 은근슬쩍 넘어가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첫째 이모댁 아들. 그러니까 사촌오빠가 효도앨범을 매번 만들어 주는 정성, 그 자체를 부러워했던 것 같았다.
사진 속 엄마는 언제나 행복해 보였다. 매번 위아래 이빨이 모두 다 보일 정도니 두말할 것도 없이 즐거우셨나 보다. 내겐 그 표정이 뻔하고 뻔해 보였다. 여행 좋아하긴 나도 마찬가지였으나, 긴 작가지망 세월과 육아가 겹치니 엄마의 삶이 참 무심히도 편해 보였다. 결국 몇 번의 무시가 오갔고, 엄마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이기적인 딸이다.
한 번도 그렇게 인정하며 살아본 적 없었건만, 결혼 후 시댁과 가까워지면서 내심 시어머니와 엄마를 많이 비교했다. 살림 솜씨며 자식을 대하는 방법이며…. 어딘지 주늑들어 있던 나는 가끔 엄마가 오셔서 육아나 살림에 대해 잔소리를 할 때면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니. 듣기 싫었다.
그랬던 내가 나이 마흔둘에 엄마를 그려보겠다 결심했다.
미대출신에 20대를 디자이너와 웹툰작가 지망생으로 살았던 난, 30대에 글에 눈을 떠 드라마판까지 노렸지만 여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20여 년간 지망생으로 산 세월이 너무 길어 내가 뭘 좋아했는지, 왜 작가가 되려고 했는지 헷갈릴 즘. 갑자기 효도가 하고 싶어졌다.
남들이 해외여행이며, 명품 백이며, 집이며, 차며…. 돈으로 갖은 효도를 일삼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가 그토록 원하는 ‘정성’ 아닐까.
태어나서 제대로 엄마를 그려본 적 없는 나는.
막상 캔버스 앞에 서니 엄마의 그 숱한 웃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사진을 되찾고, 엄마의 생김새를 뜯어보고, 한없이 웃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고 또 보면서.
엄마가 저렇게 웃는 삶을 사셔서 참 다행이다…라는 안도가 들었다.
나는 참. 못된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