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산 세월도 아니고 고작 초등학생 4년가량을 살았던 그곳이 왜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는지… 살면서 가장 가난했던 시절이 내겐 가장 큰 자부심이 된 것 같다.
부천에 올라와 바로 정착할 여유가 없었던 우리 세 식구는 이모댁에서 2년가량 얹혀살았다. 방 한 칸에 전세로 매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고 사촌들과 꽤나 안정감 있게 놀며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 양재까지 출퇴근하는 엄마가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매일을 기다리는 건 8살 어린 내게 참 서글픈 시간이었다.
옷에 관련된 일을 하시니 당연히 미적 감각도 센스도 탁월했던 엄마가 울며 기다리는 딸을 위해 고급 멜빵을 사 왔던 어느 날, 나는 그것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왜 이제 왔느냐고,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느냐고.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던져진 마음에 엄마 가슴은 생채기가 났다.
초등학교 입학 가방을 같이 사러 갈 시간이 없어, 이모 손을 붙잡고 울먹이며 시장에서 아무 가방이나 대충 골랐던 나, 피아노 과외 선생님한테 매일 볼기짝을 맞고 100원을 받아오는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들을 말할 줄 몰랐던 나. 내 얼굴에 난 멍을 보고 엄마가 냈던 용기가, 한복집셋방이었다.
셋방과 연결된 재단실과 주방
그렇게 한 부모 가정이었던 우리 가족이 오롯이 살 첫 번째 집이 생긴 것이다.
엄마가 하루 종일 한복 일을 하시는 동안, 이 골목 저 골목 뛰어놀며 오빠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가게와 방 사이를 이어주는 주방 겸 재단실에선 이선희의 진달래꽃이 울려 퍼졌고,
2학년 짜리 꼬마는 계란 프라이에 마가린, 간장까지 넣어 뚝딱 밥도 차릴 줄 아는 씩씩한 어린이가 되었다.
장사가 안돼 매번 생활고에 허덕이는 엄마의 마음 따윈 아랑곳없이,
그저 하루 종일 엄마와 같이 있다는 기쁨에 오빠와 나는 30분도 넘는 먼 거리를 걸어
엄마 심부름을 잘도 했다.
우리 가게
골목, 비디오 가게, 옆집 슈퍼, 앞집 미술학원, 오빠가 좋아하던 오락실,
침 흘리며 보기만 했던 햄버거집 바이타임….
그 시절의 내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생생한 이유는
모든 순간이 행복으로 점철돼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울고 있을 나와 오빠를 위해 젊은 시절 커리어를 포기했고,
한복집은 우리에게 새로운 터전이 되어주었다.
재봉틀 앞에 엄마.
짧으면 짧고, 길면 긴 그 시간은 나와 오빠에게 가장 행복했던 유년시절이자, 엄마의 품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