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짧게 비가 내린 어느 날, 나는 결혼을 했다.
장소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맥주 펍.
나와 남편은 그곳에서 올데이 웨딩을 했다.
이 글은 다소 다른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레퍼런스가 되길, 그리고 그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덜 힘들게 준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써내려갈 예정이다.
작년 7월, 더플라자호텔에 위치한 주옥에서 남편에게 프로포즈를 했고 그렇게 우리는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약 3년 가량을 연애했던 우리는 어느 정도는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결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몇 가지 통일되는 의견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예식장에서 하기 싫다' 였다.
인생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던 남편은 한국에서의 일반적인 예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인생에 한번 뿐인 결혼식인데 의식처럼 하고 싶지는 않다는 의견이었다. 특히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더 좋다고 강하게 말했다.
오히려 나는 평생 한국에서만 살았고 여러 결혼식을 가보면서 예식장이 꺼려졌다. 가장 큰 이유는 특별한 날인데 누가 왔는지 기억도 안 날만큼 정신 없이 보내기엔 하루가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정하게 된 게 바로 맥주 펍이었다. 그 곳은 남편과 내가 자주 가는 곳이었고 음식과 맥주가 굉장히 맛있으며 통유리에다가 공간도 제법 넓다. 김포공항, 서울역 등 지방에서 오는 하객이 비교적 이동하기 편한 위치라는 점과 공원길이 맞닿아 있다는 점, 주차공간이 꽤 넉넉하다는 점 등도 선택 이유였다.
장소를 결정하는 것은 오히려 수월했고 남편이 '올데이웨딩'을 제안하면서 일이 커졌다! 나는 장소만 다를 뿐이지 아주 소규모로 예식을 하려고 했다. 80명 남짓 들어가는 공간이라 가까운 친척과 친구만 불러서 하는 스몰웨딩 말이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나는 하객들한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우리 예식을 보기 위해 시간 맞춰서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편한 시간에 와서 우리랑 놀다가 가는 게 더 좋아.
올데이 웨딩을 하자!
사실 남편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올데이 웨딩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생각도 해보지 못한 제안. 결혼식 방식 때문에 꽤 치열하게 토론했다. 결혼식 준비 중에 가장 시간이 많이 소요된 부분일 만큼 둘의 의견 차이가 컸다.
하지만 점차 이야기를 듣고 보니 실현 가능한데다 꽤 의미 있을 것 같았다. 대신 남편에게 예식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어필했다. 우리 결혼식은 양가의 개혼이었고, 특히 나는 경상도, 남편은 전라도에서 친척 어르신들이 오시기 때문에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해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식을 1부, 2부로 나눠서 진행하게 됐다.
1부. 양가 친척들과 결혼 예식
결혼식 당일 아침, 굉장히 분주해졌다.
신부인 나는 헤어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이른 시간 샵으로 향했고 신랑은 양가 어머님 두 분과 여동생, 형수까지 총 4명을 모시고 다른 샵으로 갔다.
그 사이에 펍은 예식장으로 탈바꿈 중이었다.
예식 파트 부분은 웨딩 디렉터를 섭외해 도움을 받았는데 그 분들이 꽃 장식을 준비해주셨다. 웨딩 디렉터는 플래너와 약간 다른 역할을 했다. 스몰 웨딩을 전문으로 해서 꽃장식, 식순, 대본 등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커스텀할 수 있다.
꽃 장식은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을 메인으로 요청했다. 색감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바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4월 말, 유리창 넘어 보이는 공원길의 나무와 잘 어우러질 것 같았다.
웨딩 디렉터 님께도 싱그러운 이미지로 부탁했다.
꽃보다 풀이나 열매를 사용해도 좋겠다고 말씀 드렸다. 올리브, 레몬처럼. (실제로 청첩장은 올리브가 그려진 것으로 골랐다)
헤어메이크업을 마치고 쏟아지는 비를 뚫고 펍에 도착하니 마음에 쏙 드는 우리만의 웨딩 공간이 펼쳐졌다.
펍이 전체적으로 블랙 앤 화이트로 인테리어인데 다채로운 컬러의 꽃 장식이 되어 있으니까 더 돋보였다. 장소와 어울리도록 맥주병을 화병으로 사용했고 포토테이블에는 웨딩 사진과 포스터 등으로 꾸몄다.
버진로드가 짧긴 하지만 제법 예식장 같은 느낌이 났다.
12시 식을 위해 하나 둘 친척들이 찾아오셨다.
식당이기 때문에 신부 대기석은 없었고 대신에 신랑 신부 모두 입구에서 하객들을 맞았다.
하객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가 있었다. 포토부스다.
요즘 유행하는 인생4컷 같은 건데 큐브 형태로 된 포토부스를 입구에 배치해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하객들이 즐길거리를 준비했다.
행사 내내 대여한터라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전혀 후회되지 않는 지출이었던 '포토부스'. 신랑신부와도 찍고 같이 온 가족이나 지인과도 여러 컷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촬영이 끝나면 바로 사진이 여러장 인화되고 한 장은 축하메시지와 함께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시스템이다. 인생4컷이 익숙한 젊은 하객들도 좋아했지만 연세 많으신 어른들이 정말 좋아하셨다. 저 축하메시지들은 신혼여행 다녀와서 쭉 읽었는데 결혼식이 다시 떠올라서 행복했다.
12시 식이 시작됐다.
의외로 식은 굉장히 포멀하게 구성했다. 그냥 해야해서 하는 걸 가장 싫어하는 신랑은 반대했지만 밀어붙인 부분이었다. 아직은 한국 어르신들에게 결혼식은 식순이 있는 예식을 뜻하기 때문에 서울까지 먼 걸음하셨는데 결혼식은 보고 가셔야 할 것 같아서였다.
이번 결혼식에서 대원칙이 하나 있었다.
내가 정말 싫은 것, 남편이 정말 싫은 것은 하지 않을 것!
하지만 정 싫은 것이 아니라면 부모님 뜻도 허용할 것!
우리의 결혼식이긴 하지만, 부모님도 손님을 부르는 잔치라는 건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적어도 우리 고집 때문에 부모님이 창피한 결혼식을 하는 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가지는 부모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한복을 입고 싶다는 친정 어머니의 바람대로 양가 어머님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셨다. 대신 식당이라 화재 위험이 있어 플랜트 세레모니로 선택했다. 무럭무럭 잘 자라는 의미로 화분에 두 분이 물을 주는 의식이다. 싱그러운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신부 입장도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이 부분에 대해 다들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포맷이 색다르다보니까 요즘 유행하는 신랑신부 동시입장을 선택할 줄 알았다고 주변에서 말했다. 물론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신랑에게 내 딸을 맡긴다는 이미지라서 남편도 부정적이었고, 나 역시도 비슷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고리타분하긴 하지만 많은 딸 가진 아버지들은 딸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것이 로망이라고들 한다. 무뚝뚝한 우리 아빠는 별다른 말씀을 하진 않으셨지만 엄마가 살짝 귀뜸을 하셨다. "너희 아빠는 너 손 잡고 입장하고 싶을거야."
아빠 손을 이렇게 잡아본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입장하기 전에 아빠와 대화했던 게 기억이 난다. 손을 잡은 채로 아빠가 "잘 살아라. 행복해야 해. 긴장하지 말고"라고. 그 말을 하는 아빠가 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축복 받는 결혼식이 이런거구나, 라고 생각했다.
혼인서약서를 읽고 시아버님의 축사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쑥스럽다며 축사를 거절하셨던 아버님은 과거 꽤 규모가 있는 사업체를 운영하셨던 대표님답게 글자 컬러까지 바꿔가며 워드로 축사를 적어 보내주셨다. 축사 내용도 감동적이라 예식 중에 처음으로 울컥했다.
우리 아버지는 축사를 부탁했더니 역시나 쑥스럽다고 거절하셨다. 그러곤 돌아온 대답은 "축가할래". 우리집 식구들이 원래도 흥이 많은 편인데 결혼식에서도 그럴 줄 몰랐다. 아빠의 축가, 여동생의 축가, 그리고 신부의 축무까지. 흥겨운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남편은 당일 아침부터 예식 내내 계속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인생의 절반 가량을 혼자 외국생활을 해왔던 터라 자신의 가족이 생긴다는 것에 감동을 크게 받은 모양이었다. 연애 3년간 단 한번도 안 울던 사람이 울보가 되니까 어찌나 웃기던지. 심지어 식순 마지막에 하객들과 양가 부모님께 인삿말을 준비해놨는데 한 마디도 못하고 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좋든 싫든 우리 뜻대로 허락해주신 양가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양가 부모님을 차례대로 안아드리고 두 사람의 행진으로 식을 마쳤다.
하객들을 위한 식사는 식당 셰프들이 준비한 코스로 나갔다. 원래의 취지에 맞게 음식 하나는 정성껏 준비했다. 뷔페에 익숙한 친척들은 낯설어 했지만 어지간한 결혼식장 음식보다 맛있었고 파스타, 피자가 아닌 어른들을 위한 메뉴도 별도로 코스에 구성했다. 다행히 펍에서 결혼한다고 했을 때 가장 난색을 표했던 친정 부모님도 너무나도 좋아하셨다.
시어머님: 둘이 마음 맞춰서 이렇게 준비한게 참 기특하다. 결혼식만으로 그게 보여서 너무 기뻐.
시아버님: 우리집에 없던 흥 많은 며느리가 들어와서 기쁘구나. 준비하느라 고생했고 고맙다.
친정아버지: 생각보다 긴장해서 축가를 망쳐서 아쉽다. 둘째 딸 결혼식 때는 연습 더 해야지 (ㅋㅋㅋ)
친정어머니: 정말 기억남는 결혼식 되겠다 싶네. 너무 뜻 깊고 예쁘더라.
여동생: 언니,,, 진짜 완벽한 E의 결혼식이다...
1부가 끝난 무렵에는 겨우 오후 2시경..
아직 2부가 남았다.
2부는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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