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어이가 없네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나에게 벌어졌다.
오피스텔 전세보증금을 못 돌려주겠다는 집주인을 만난 것.
그것도 이사가는 날 아침에 뒷통수를 맞았다.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 2년간 살았다. 전세계약 만기일은 6월이었고 3개월 전에 문자와 전화로 계약해지 통보를 했다. 통보하고 한 달 뒤, 엄마가 다시 한번 연락해서 재차 확인하라고 하셨다. 몇 개월 전 같은 건물에 사는 한 세입자와 집주인 아저씨의 분쟁으로 소송이 진행됐고 여전히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계약해지 통보를 할 때 기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네~"라고 하셨고 아저씨는 서울에만 건물이 열 몇 채를 가지고 있는 꿈의 건물주셔서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본인의 여건이 어려워 한두달만 더 기다려달라고 하셨다. 전세보증금을 빌려주신 부모님께서도 사람이 사업을 하다보면 자금조달이 어려울 때가 있다며 허락하셨고 아저씨를 믿고 기다렸다.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
집주인 아저씨는 당연히 돌려받아야 하는 내 전세금을 주지 못한 이 상황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으셨다. 오히려 세입자가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보였다. 약속된 시간은 계속 지나가는데 단 한 통의 연락도 없으셨고 새 전셋집을 구해도 괜찮겠냐고 전화를 하면 그제서야 더 기다려달라고 하셨다. 그 기다림에는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었다. 끈질기게 연락한 끝에 그해 8월 말. 다른 세입자와의 소송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내가 전화해서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나 : 마침 제가 마음에 드는 집이 있어서요. 아저씨도 다른 세입자 구하셔야 하니까 9월 말에 이사나가는 걸로 할게요.
집주인 : 아 그게....... 다음 사람이 얼른 들어와야.....
나 : 네~ 그러니까 9월 말에 이사 갈게요. 저 6월 계약만기였는데 9월 말이면 3개월이나 기다려 드렸어요.
집주인 : 그럼 아가씨가 피터*에 집 올릴래요? 세입자가 구해져야 돈을 줄 수가 있어서.
나 : 부동산에 올리시는 게 더 낫지 않으세요?
집주인 : 부동산은 좀... 아니 피터*에 올리는 게 빨라요.
그때 알았다. 나는 아저씨가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집들 다 놓쳐가며 전전긍긍 기다렸는데 정작 이 일을 만든 아저씨는 조금도 손해볼 마음이 없다는 걸. 다음 세입자가 오기 전까지는 내 전세금을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마음에 드는 집이 있었고 계약을 하려면 입주일자를 확정해야 하는데 임대업을 하시는 분이 그걸 모를리 없다. 정말 본인만 생각한 발언이었다. 도저히 참고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내용증명서를 집주인 아저씨에게 송부했다. 9월 30일자에 이사를 나갈 것이고, 그 날까지 보증금을 준비해 달라고.
사실 이걸 보낼 때 마음이 안 좋았다. 여태 7~8년 간 자취생활을 하면서 집주인과 이렇게 갈등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다. 그동안 좋은 집주인 분들을 만난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나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용증명서를 보내놓고도 나중에 따로 연락해 다시 상황 설명하며 30일에 공과금 정산을 위해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9월 30일 이삿날 아침. 이삿짐은 새 오피스텔로 떠났고 집주인 아저씨를 만났다. 텅 빈 집을 함께 훑어보며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집주인 아저씨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셨다.
나 : 새 집에 짐 옮기는거 도와드리러 가야 해서요. 공과금 정산하고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집주인 : 그래요. 근데 잠시만. 아가씨도 아직 젊으니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봐요.
나 : (어리둥절)
집주인 : 내가 임대업을 오래 했고 다른 사례들도 찾아봤어요. 이런 경우에 만약 재판을 하게 되면 아가씨가 이자를 5% 받게 돼. 두 가지 방법 중에 아가씨가 선택할 수 있어요. 아가씨가 새 집으로 이사를 하면 기다린 만큼 내가 그 5%를 일할로 계산해서 주면 되고,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집을 점거하는 방법이 있어.
나 : (뇌에 버퍼링이 잠시) 네? 잠깐만요 아저씨. 지금 말씀은 그러니까. 오늘 보증금 못 돌려주신다는 말씀이에요?
황당 그 자체였다. 언젠가 부모님이 서울은 눈 뜨고 코 베어가는 곳이라고 하셨는데 사실이었나? 나보다 훨씬 연세도 많으신 집주인 아저씨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내가 처음으로 화를 내니 아저씨도 얼굴색이 바뀌셔서 집을 모두 원상복구 시켜놓고 나가라고 길길이 화를 내셨다. 입주 때부터 2년간 살면서 고쳐달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던 것들인데 그게 내 탓이라고 하셨다. 고성이 서로 오갔고 결국 내 입에서 "이렇게 하시면 저도 재판으로 갈 수 밖에 없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받아치는 아저씨의 대답은 날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내가 저번 재판 때문에 얼마나 고생한지 알면서 그런 소릴해?"
딱 어울리는 말이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
소송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나 역시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고 싶지 않았고 칠순은 훌쩍 넘어 보이는 연세 많으신 분과 대거리했단 생각을 하니 스스로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다음날 먼저 사과하고 둥글게 해결하기 위해 연락을 드렸다. 하지만 바쁘다는 둥, 원상복구 다 시켜놓고 명도라는 둥, 왜 아가씨 마음대로 하려고 하냐는 둥 온갖 이상한 말만 돌아왔다. 내가 지금 마음대로 해서 이렇게 상황이 온건가? 외려 내 꼴은 비굴하게 구걸하는 모양새인걸.
일방적으로 전화연결이 끊겼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공덕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며칠간의 회유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고 결국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소송전이 시작됐다.
((예고편))
1억이 넘는 전세보증금을 이삿날 아침 떼인 세입자 김 씨. 변호사를 선임하고 임차권등기명령신청을 위해 가전집기가 다 빠진 집에서 살게 되는데... 한편, 집주인 아저씨의 무대포 어이상실 말말말 퍼레이드! "누가 마음대로 법적으로 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원상복구하고 나가라니까 왜 맘대로 나가요?" 그래, 나도 끝까지 안 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