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으로 연예인 식단을 먹던 날
갓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며 체중계 위에 올라섰던 그날, 트레이너의 막막하고도 당황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56kg’.
내 몸무게는 연습생이 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숫자였지만 부끄러움은 잠시였다. ‘앞으로는 말로만 듣던 연예인 식단을 먹는다니!’ 뭔가 특별한 방법일 거라는 묘한 기대감에 신기하기도 했고 가슴이 뛰었다. 다이어트 여정의 초반기였다.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방금 전까지 숨고만 싶던 창피함은 어느새 달아나 버리고 나는 곧 전형적인 다이어트 식단을 따르기 시작했다. 기름기 없는 살코기와 야채, 약간의 복합 탄수화물. 닭가슴살 샐러드 도시락을 싸 다니며 정석대로 지켰다. 식단을 먹는 것이 조금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때는 강박적으로 먹지 않았다. 그저 시키는 대로, 그렇게만 하면 살이 빠질 줄 알았고 실제로 곧잘 빠졌다.
나는 원래 공원을 천천히 걷거나 가볍게 등산하는 것을 좋아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자연 속을 거닐다 보면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흙을 밟는 규칙적인 발소리는 고된 일과 뒤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귓가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꺄르르 웃음소리에 모든 피로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내게 운동은 단순히 살을 빼기 위한 수단이 아닌 바쁜 일상 속에서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운동이라곤 동네 헬스장에서 깨작거리던 게 전부였던 나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새로운 구성으로 짜여진 PT가 반복되었고 헬스장의 다양한 기구 사용법을 하나씩 익혀갔다. 운동을 하고 나면 두 볼은 붉게 달아올랐고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밤마다 두드려 맞는 듯한 근육통이 찾아왔지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헬스장으로 향했다. 마법의 그날에도 고강도 운동에는 예외가 없었다.
덜 먹고 더 움직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약 3년간 아침 일찍 일어나 헬스장으로 출근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지하철 속 정장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오전 9시쯤 헬스장의 매트 위에 있었다. 빌딩 두 채를 얹어 놓은 것만 같은 두 눈을 부릅뜨고 스트레칭을 했다. 무언가를 먹고 싶은 마음보다 푹 자고 싶은 마음이 더 클 정도로 졸음은 쏟아졌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무거운 기구들을 들었고 한참 동안 세트를 채운 뒤 런닝 머신 위를 뛰었다. 헬스가 끝나고 버스를 기다리며 먹는 사과 한 알이 나의 아침이었다.
보컬 레슨 후 댄스 학원으로 이동하면 또다시 운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신 스트레칭을 한 뒤 거울 앞에서 턴 연습을 했고 뜀박질로 몸을 예열시켰다. 춤 레슨이 끝나면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내렸다. 그 후에도 쉬지 않고 전신의 근력 운동을 시작해서 다시 몇 시간이고 춤을 췄다. 물조차 마음껏 마실 수 없었다. 레슨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체중계에 올라가야 했고 줄자로 몸 곳곳의 치수를 기록해서 제출해야 했기에 목을 살짝 축일 정도로만 마실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갈 때도 허락을 받아야 했고 변기 위에 잠깐 앉아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었다.
눈물의 다리 찢기와 다이어트의 늪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면 댄서 두 분이 내 다리를 한쪽씩 맡고 잡았다. 발목과 발가락이 안쪽으로 말리지 않도록 일자를 유지해야 했고 양쪽 다리를 벽과 평행이 되도록 밀어냈다. 골반을 열기 위한 유연성 훈련이라고 했다. 춤 연습실에 잔잔한 음악이 가득 흘러나와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만 같다가도 다리가 찢기고 골반이 열리는 순간 신음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더니 눈물이 찔끔 났다. 소리를 꽥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를 지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소리를 지르면 배와 허리에 힘이 더 들어가서 고통만 더 심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2분만 더 가자.”
선생님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태어나서 2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긴 줄 몰랐다. 출산의 고통은 얼마나 심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다리가 벽에 닿을락 말락 할 때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5초밖에 지나지 않았다. 다리를 한 번 보고 다시 시계를 한 번 봤다. ‘6초.. 7초..’ 애처로운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봤지만 역시나 자비란 없었다. 바닥을 보며 조용히 체념의 눈물을 떨궜다. 그렇게 다리를 한껏 찢고 나면 냄새나던 지하 세계에서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늘은 어느새 깜깜해져 도시의 밤거리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골목마다 맛있는 고기 냄새가 풍겨왔고 음식점들은 화려한 조명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간장게장집과 아귀찜 가게의 유리창 너머로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함께 수업을 마친 연습생들은 편의점이라는 레스토랑으로 향했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었다. 딱 하나. 바로 숙소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하면 후다닥 샤워를 하고 이불 위에 쓰러졌다. 배에서는 꼬르륵꼬르륵 쉴 새 없이 천둥 번개가 쳤지만 눈을 감으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살은 쭉쭉 빠졌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다이어터들처럼 나 역시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운동을 즐겼다. 눈에 띄는 몸의 변화는 신기했고 다이어트 과정에서 성취감도 있었다. 그렇게 먹고 움직이는데 살이 빠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감량에 성공하자 하루하루 뿌듯함이 가득 찼고 다이어트에 나름 재미를 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늪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헬스 트레이너는 앞으로 매일 체중을 재고 감량한 그램 수를 표에 적어 제출하라고 했다. 처음엔 가볍게 즐기며 시작했던 운동을 의무적으로 하게 되면서부터 점점 욕심과 강박이 싹트기 시작했다. 머리끈의 무게까지 덜어 보려 헝클어진 상태로 체중계에 올라갔고 등산을 가면 무조건 산 정상을 찍고 내려와야 했다. 아무리 열심히 힘차게 걸었어도 그날의 목표치를 채우지 못한 날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다. 성과를 내야만 한다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채 이른 아침부터 나는 ‘먹기 위해서’ 혹은 ‘먹은 만큼’이라는 압박감 속에서 매일 땀을 흘렸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죽음의 트레이닝을 반복하자 운동에 대한 반감마저 생겨버렸다. 나중에는 헬스의 ‘ㅎ’ 자만 들어도 지루함과 불쾌감이 몰려왔다. 누군가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 사람과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질 정도였다. 그런 생활을 이어가자 어느 순간부터는 식단과 운동의 강도를 아무리 늘려도 체중에 변화가 없었다.
‘이렇게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내가 운동 중독 상태에 이르렀을 때 나를 가장 미치게 했던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