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필요 없고 살만 빼면 돼

살쪘어? 네 인사는 안 받아!

by 양우영

“에이 씨발! 야! 너네 집 부모님이 재벌이야? 내가 알기론 아닌 것 같은데? 아주 편해 보인다?”


그의 담배 연기가 작은 사무실 안에 가득 퍼졌다.


“뮤지컬 웹드라마, 노래 가이드, 야구 시구장!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은 줄 알아? 잘 생각해 봐. 네 진짜 문제가 뭔지. 야, 생각해 봐. 네가 노래가 늘면 얼마나 늘겠냐? 가수는 무슨 가수? 야, 넌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살이나 빼고 와서 말해. 네가 배우냐? 왜 그렇게 성격이 조용해? 다른 애들처럼 정치를 해, 정치를! 나한테 다가오라고! 내가 만들어준다니까? 평생 보컬 트레이너 하면서 월급쟁이로 살고 싶어? 어? 야, 그 나이 많은 여배우, 그 누나도 맨날 고구마 먹고 관리하잖아. 어? 어쩔 수 없어. 연예인이 그래서 힘든 거야.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 너는 물만 먹어도 살찌는 체질이니까 평생 관리하면서 살아야 돼! 이건 네 숙명이야 숙명!”


창밖에는 예쁜 눈송이가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2014년 1월 16일 목요일 밤, 연습실로 돌아오는 길거리에서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른 채 하염없이 엉엉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초라한 내 자신이 너무 수치스러워 미끄러운 눈길을 도망치듯 빠르게 걸었다. 캄캄하고 작은 보컬 연습실의 한구석으로 뛰쳐 들어가 처참한 현실에 넋이 나간 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수없이 시도함과 동시에 실망하는 것도 나였고 일어서는 것도 오롯이 나의 책임이었다.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탈진하기 직전까지 목이 찢어져라 오열했다. 만약 내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만 빼면’의 환상


반복되는 좌절 속에 남은 것은 ‘7년’이라고 적힌 무거운 종이 계약서와 텅텅 빈 주머니, 먹을 수 없는 삶이었다. 무고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부모님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부족함 없이 사랑받으며 자라왔던 나였다. 그날 그 사무실에서 미친 사람마냥 숨을 헐떡이며 오열하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야, 오늘 있었던 일 부모님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 그리고 힘든 거 티 내지 마. 연예인은 힘들어도 웃어야 돼. 그래서 힘든 거야.”


태어나 처음으로 내 얼굴 앞에서 직접적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상사에게 나는 그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집에서는 잘 먹어서 예쁘고 건강한 딸이었지만 소속사에서는 그저 살 안 빠지는 한 마리 돼지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아무리 성실하고 노래를 잘해도 그들의 세계에서는 미운 오리 새끼일 뿐이었다.


외모에 대한 비판은 당연했거니와 내성적인 성격에 대한 비난, 가족을 향한 조롱까지 일말의 저항 없이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나는 그저 노래를 좋아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정이 많은 소녀였을 뿐인데. 그날의 면담은 심리적으로도 큰 충격이었고 내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꿈 앞에서 살이 찐 나는 죄인이었다.


수많은 모욕과 비교의 칼날 앞에서 내 영혼은 갈기갈기 찢겼다. 냉혹하고 잔인한 사회의 단면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수치심에 고개를 잘 들지도 못했다. 웃는 것조차 사치라고 느낄 만큼 절망스러웠다. 죄책감, 수치심, 열등감, 자괴감, 굴욕감, 패배감, 우울, 무기력, 회의감 등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나는, 내 영혼은 그날 그 작은 사무실에서 죽었다.


“야, 뭐 쳐 먹었는지 종이에 적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적어.”


욕설과 담배 연기가 자욱했던 그 좁은 공간에서 나는 공포를 느꼈다. 절벽 끝에 몰린 나는 바들바들 떨며 이것저것 적기 시작했다.


“이것밖에 안 먹었다고? 더 있잖아. 더 적어.”


단 한 번도 음식을 마음 편히 먹은 적이 없던 나였다. ‘도대체 뭘 더 적어야 하지?’ 결국 나는 평소에 입 근처에 대지도 않던 술을 마셨다고 거짓 고백을 했다. 상사들이 술을 좋아했기에 내가 같잖은 과자나 치킨을 먹었다고 이야기하면 공감은커녕 ‘계속 적으라’는 말만 돌아올 게 뻔했다. 술을 마셨다고 말하면 그 소름 끼치는 끔찍한 공포를 끝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5kg 감량의 감옥


작은 보컬 연습실 구석에서 내가 들었던 말들을 곱씹으며 한참을 있었다. 속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참을 흐느끼다 겨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럴 수가. 하필 운명의 장난처럼 그날은 내 파트의 진도를 나가야 하는 날이었다. 울음을 가까스로 멈추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바나나 한 개와 다이어트로 인한 위궤양 약을 먹고 안간힘을 쥐어 짜냈다. 처음으로 춤을 배우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개 같은 세상. 내가 보여줄게‘

나는 악에 받쳐 반쯤 미쳐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또다시 오열을 하며 굳게 다짐했다. 가족의 사랑을 떠올리자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시간들도 다 참아낼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이 솟아났다.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아니 꿈속에서조차 그 결심을 되뇌었다. 시련이 계속 오는 것은 나를 더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믿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언젠간 내 인생에서 값진 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그날의 멸시와 비난은 내게 엄청난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그 경험 덕분에 나는 독기를 쏟아부었고 15kg을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나를 증명하려는 분노로 가득 찬 욕망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단기간에 얻은 성공은 낭떠러지 위의 가는 외줄 위를 걸어가듯 늘 아슬아슬했다. 점점 몸의 여기저기에서 이상 신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자책감은 내 몸을 병들게 했고 그 아픔은 마음 깊숙한 곳까지 퍼졌다. 지나친 다이어트의 부작용이었다. ‘그래, 누구도 아닌 내 선택이었지. 근데.. 어쩌다 이런 가시밭길을 걷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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