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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Nov 19. 2021

고춧가루를 선물하세요

  친한 대학원 동기 누나가 선물을 주고 갔다. 점심 먹고 회사에 들어왔다. 노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컴퓨터 화면 귀퉁이에 카카오톡 메시지가 뜬다. 누나가 좀 이따 우리 회사 근처를 지나는데 전화하면 잠깐 내려오란다. 잠깐이 아니라 오래여도 된다고 답을 보냈다. 응답 내용이 의외다. 본인이 시간이 없단다. 헐. ㅋㅋ 알았다고, 오면 연락하라고 답했다.     


  누나가 회사 앞에 왔단다. 엘리베이터가 늦는다. 기다릴 사람 생각해서 계단으로 걸어 내려간다. 로비 통유리 밖에 반가운 실루엣이 서성인다. 뜀걸음으로 다가간다.

- 누나, 어쩐 일이셔?!

- 응, 너한테 뭐 주고 갈게 있어서.

- 뭘 또 주시려고 먼 걸음을 하셨대.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지.

- 내가 우리 애들 아빠랑 요 근처 어디 가던 길이거든. 자, 이거 받아.

- 이게 뭐야?! 가만, 형님이랑 오셨다고? 아, 저기 차 안에 계시는구나.


  검은색 밴 운전석에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다. 내가 조수석 쪽으로 다가서니 창문이 내려온다.

- 형님, 안녕하세요? 저, 누나 학교 동기 Hoon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진작 얼굴 뵙고 인사드렸어야 하는데. 언제 차든 식사든 같이 해요.


  그래요, 수줍게 말씀하시고 허허 웃으신다. 손에 받아 든 종이 가방이 묵직하다. 누나에게 이게 뭐냐고 다시 물었다. 누나가 시골 어머니가 보내준 고춧가루란다. 가방 입구를 찢어지지 않게 벌려 애꾸눈으로 안을 본다. 빨간색 도톰한 비닐 팩 두 개가 안에 들었다. 아이고, 이 귀한 걸. 고맙다고 인사하려는데 누나가 차에 오른다. 고마워, 누나, 잘 먹을게, 조만간 봐, 형님 운전 조심해서 가세요, 고마워 누나! 닫히는 차창 사이로 흔드는 손이 보인다. 근처에 무슨 그리 급한 용무가 있으신지 차가 붕 출발한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종이 가방을 열었다. 곱게 빻은 고춧가루다. 가을 단풍을 닮은 빨간색에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이걸로 떡볶이도 해 먹고, 찌개도 끓여야지, 제육볶음은 또 얼마나 맛있으려고. 고마운 마음이 다시 차올라서 누나에게 메신저를 보낸다.

- Hoon] 누나 고마워! 집에서 맛있는 음식 많이 해 먹을게 ㅎㅎㅎㅎ

- 누나] 완전 파이널 리미티드 에디션이야. 엄마 고추농사 파이널 버전 ㅎㅎㅎㅎ

- Hoon] 캬 초한정판이구만

- 누나] 마자마자

- Hoon] 고마워 누나 영광이야

- 누나] 별말씀을~ 맛나고 행복한 시간 함께 할 수 있어서 내가 영광이지 ㅋㅋ     


  고춧가루 선물 받고 이렇게 감동받아보긴 난생처음이다. 아니, 실은 고춧가루를 선물로 받아본 것 자체가 처음이다. 근데 이거 꽤 임팩트 있는 선물인 것 같다. 그 이유를 굳이 또 따져본다.


  우선, 고춧가루 선물은 아주 유용하다. 쓸모가 있는 선물이다. 그것도 용처가 매우 다양하다. 잠깐 전술했지만 떡볶이, 각종 찌개, 제육볶음에 들어간다. 아니, 고춧가루 없이는 못 만든다. 사실 우리나라 음식 중에 고춧가루 안 들어가는 것이 없다시피 하다. 고춧가루는 선물 받은 사람이 가만히 두고 감상하거나 집안 구석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선물이 아니다. 시쳇말로 ‘예쁜 쓰레기’가 아니다. 특히 나처럼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제격이다.     


  쓸모 있다는 것은 사용 빈도가 높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고춧가루 안 쓰는 음식이 없다고 했다. 앞으로 두 덩이의 고춧가루가 없어질 때까지, 집에서 밥을 지어먹을 때마다 누나가 준 고춧가루를 어떻게든 아주 조금이라도 쓰게 될 거다. 고춧가루가 든 비닐 팩을 찬장에서 꺼낼 때마다 생각할 것이다. 아, 이거 누나가 우리 식구들 먹으라고 준 거지. 딸아이 먹일 아빠표 떡볶이를 만들 때마다 누나의 동기 사랑을 도톰한 질감으로 만져볼 것이다. 준 사람 입장에서 자신의 긍휼한 마음을 받은 이가 이렇게 자주 상기하는 선물은 흔하지 않다. 아주 일 잘하는 선물이다.     


  혹여 버려질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다 써서 소멸할지언정 분실, 유실되거나 심지어 폐기될 우려가 없다. 고춧가루의 저장성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되지 싶다. 조상님들의 지혜다. 공산품 식재료 포장지에 쓰여있듯 ‘직사광선을 피하고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 밀봉 보관’ 조건만 지키면 장기간 소장이 가능하다. 부엌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만 잘하면 된다. 아니, 소금, 설탕, 밀가루, 부침가루, 각종 분말 있는 곳에 무심하게 모아 두시라. 어디 가지 않겠고 늘 있는 곳에 있을 것이다. 잃어버리거나 없어지지 않고 먹을 때마다 조금씩 줄어들 뿐이다. 고춧가루 줄어든 만큼 선물 받은 사람의 애정은 점점 채워진다.     


  마침내 다 써서 이제 더는 세상에 없는 선물이 됐대도 실망할 일이 아니다. 고춧가루는 누나의 마음을 담은 선물로써 소명을 성실히 완수했다. 텅 비어버린 비닐 팩을 깨끗이 씻어 분리수거 상자에 버리는 순간에도 생각할 것이다. 누나가 준 고춧가루 다 먹었네, 그래 이거 참 맛있었어. 이거로 온갖 거 많이 만들어 먹었는데. 다음에 누나 만나면 맛있는 밥 한 번 사야겠구먼.     


  이것 말고도 고춧가루 선물의 장점이 마흔다섯 가지는 더 있을 것 같지만 눈치껏 여기서 줄인다. 나도 누나처럼 아끼는 사람에게 시골에 계신 엄마가 손수 피 같은 땀 흘려 농사지으신 밭에서 나온 고춧가루를 예쁘게 담아 선물하고 싶다. 싶은데 우리 엄마는 시골에 계시지 않는다. 농사라면 자식 농사 말고는 경험이 없으시다. 그러고 보니, 누나 선물이 연로하신 어머니가 마지막 농사로 거두신 초초초초 슈퍼 울트라 익스트림 파이널 에디션이었네. 선물 중에서도 명품관 가장 좋은 자리에 우아한 조명받고 있어야 할 최고급이다. 사무치게 고맙다. 이제부터 선물은 고춧가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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