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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Aug 23. 2023

팀장이 도로 팀원 되면 <속편>

  인사팀에 서류를 제출하러 간다. 정규직 전환 심사 대상인 팀원이 있다. 그의 당락, 생사여탈의 결정이 담긴 문서다. 그는 2년 전 비정규직, 그러니까 계약직으로 팀에 합류했다. 경력 연차에 걸맞은 숙련도로 업무해 왔다. 큰 흠결은 없었다. 그런 그가 얼마 전에 뜻밖에 업무 과실을 범했다. 방송사고의 원인 제공자가 됐다. 하필 계약 기간 만기가 가까워 오는 시점이었다. 그가 시말서, 정확히는 방송사고 경위서라고 부르는 것을 작성하고 있을 때 나는 그가 대상인 정규직 전환 심사 평가서를 채웠다.


  일전에 본 글의 제목과 같은 글줄을 남겼다. 회사 선배 중에 팀장 직무를 오래 수행해 온 이가 있다. 인사발령을 통해 그가 ‘면팀(팀장을 면하는 것을 뜻하는 일종의 회사 은어)’한 것을 알았다. 어디 다른 부서로 가지 않고 자신이 지휘하던 팀에 남았다. 그가 비운 자리는 그의 지휘를 받던, 나와는 동기 지간인 팀원이 물려받았다. 나는 동기의 인품을 잘 안다. 이제는 신분을 맞바꾼 전임 팀장과 선후배의 도리를 유지하고 인간적 유대 안에서 잘 지내리라 낙관했다. 오르다 더 오르지 못하면 언젠가 내려와야 하는 법, 회사 조직의 경향 속에서 별 수 있나 싶었다.


  같은 일이 얼마 전 인사팀에도 있었다고 들었다. 나이 오십 줄의 팀장이 갓 마흔의 팀원과 임무를 맞교대했다. ‘들었다’라고 인지의 시간차를 표현한 까닭은 내가 복무하는 방송 현업부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의 큰 관심은 없었다는 말이다. 알았을 때엔 잠시 놀랐고 이내 심드렁해졌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그 팀도 예외가 아니구나 싶었다. 전임 인사팀장의 면팀 생활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팀장이 된 옛 팀원에게 사무치는 원한을 사지만 않았다면 괜찮으리라 짐작했다. 벌이 하려면 별 수 있겠는가, 적응하는 수밖에.


  신임 인사팀장에게 서류를 건넨다. 요청하신 서류 가지고 왔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정확히 의사만 주고받는 대단히 경제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새 인사팀장, 그가 팀원이던 시절부터 아주 모르는 이는 아니었다만 딱 그런 성품이다. 어찌 보면 진중하고, 다르게 보면 뻣뻣하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군더더기 말없이 업무 본연에 집중한다. 그런 사람이 인사팀장이 되는 것인지 팀 안에서 그렇게 길러지는 것인지는 나로선 알 수 없다. 여운이 짧은 싸구려 위스키 같은 뒷맛을 다시며 돌아 나온다. 그때 시야에 무언가 이채로운 시각 정보가 들어온다.


  우리 회사 사무실의 좌석 배치는 대체로 수직의 위계를 따른다. 팀장이 벽이나 기둥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으면 그 앞에 이열 종대로 팀원들 책상을 줄 세운다. 팀장과 가까울수록 선임 팀원이고 끝으로 갈수록 낮은 연차나 직급이다. 인사팀 맨 끝에서 하나 안쪽 자리에 희끗희끗한 뒤통수가 불쑥 솟았다. 누구신고 하니, 바로 전임 인사팀장이다. 고개를 완전히 돌려 인사팀 전체의 풍경을 프레임 안으로 다시 담는다. 들어올 때와 달리 완전히 생경한 그림이 된다. 새 자리에 앉은 익숙한 두 얼굴, 그중 끄트머리로 몰린 흰 머리칼이 시선을 빼앗는다.


  자동 유리문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방금 전 찰나에 포착한 전임 인사팀장을 머릿속 암실에서 현상해 낸다. 얼마 전까지 그의 지휘를 받던 새 팀장과는 제법 이격 된 자리다. 업무 중요도 탓에 직접 왕래할 일은 뜸했을 더 젊고 어린 팀원들이 양 옆에 앉았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은 바쁜 것 없이 무언가 멀뚱히 보여준다. 전임 팀장의 손가락도 키보드와 마우스 위에 가만히 안착한 상태다. 그의 구부정한 등허리가 수화기를 들고 있거나 경쾌하게 자판을 두드리는 주변의 동료들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언뜻 보면 그의 자리만 사무실의 다른 시간대와 절묘하게 합성한 스냅사진 같다.


  막연한 상상은 적나라한 실제와 엄청나게 다르다. 팀장이 도로 팀원이 된 현실은 나의 무책임한 낙관을 뼈아프게 비웃는다. 나의 상상은 순진한 기대와 유아적 감상에 다름 아니다. 직접 내 눈으로 봤던 것인지, 달의 뒷면처럼 뒤통수 앞에 표정을 상상한 건지 혼란스럽다. 전 인사팀장의 무표정, 컴퓨터 모니터로만 향하는 그 생기 없는 시선이 잊을 수 없는 잔상으로 남았다. 그것이 연민과 동정 때문이냐면 단연코 그렇지 않다. 바로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년퇴직이 유일한 소망인, 다른 길은 준비하지 못한 대안 없는 중년 가장이 된 나 자신을 멀티버스처럼 여러 모습의 내 미래 가운데 꽤나 암울한 버전으로 목격하게 된 것 같아 어지러웠다.


  다음 달이면 나는 다시 학교에 간다. 생업과 학업을 어렵게 병행할 계획에 있다. 그것이 인생 2막의 작은 첫걸음이 되는 희망을 가슴에 품는다. 그러다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너무 늦은 출발은 아닌지 의심한다. 킥스탠드를 내리지 않고 페달만 열심히 밟은 자전거처럼 아무 데에도 닿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부러 걱정한다. 상념의 끝에 그럼에도 스스로 다잡는다. 길의 끝에 무엇이 있든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이라도 손에 쥐고 바지런히 움직이는 것, 적어도 그것이 지금의 불안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신임 인사팀장에게 건넨 사무용지 한 장 짜리 서류는 아래에 2행 2열의 간단한 장표를 첨부하게 돼있었다. 한쪽 머리에는 ‘정규직 전환’, 다른 쪽에는 ‘계약 해지’가 쓰여 있다. 그 아래 빈칸에 팀장이 의견을 써넣는다. 거기에 뭐라고 썼느냐. “팀 업무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이므로 정규직 전환을 앙망함.” 그 위 상세 사유란에는 이렇게 전술했다. “계약 기간 중 한 차례 업무 과실이 있었으나 대체로 업무 완성도가 높음. 성장 발전의 계기가 되어 더 우수한 자원으로 활약할 것으로 기대함.” 사고 친 팀원아, 정규직 전환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만 그것이 끝이 아니란다, 너에게도 언젠가 내리막길을 고민할 나이가 온다. 인생이 그렇더라, 하나의 관문을 어렵게 통과하면 또 다른 관문이 계속 나타나더라. 아울러, 전임 인사팀장의 즐겁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우울하지 않은 ‘면팀 생활’을 온 마음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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