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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an 12. 2023

남편, 나 회사 그만둬도 돼?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럴 리 없다. 지난해 건강검진에서 노후화되고 있는 신체 기관 중 청력이 그나마 멀쩡했다. 이상 징후는 청자가 아니라 화자에게 있다. 발화자는 방금 내가 만들어준 소맥 폭탄주 첫 잔을 시원하게 비운 여성이다. 나의 가장 든든한 경제 공동체 구성원이자 생존 동반자, 바로 아내다. 그녀가 결혼생활 십여 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을 꺼냈다.


  토요일 저녁, 무얼 먹을까 궁리하다 단골 고깃집을 찾았다. 특별한 인연도 있다. 아내의 옛 동료가 창업한 식당이다. 아내 회사는 식재료를 유통하고 외부 기업과 단체의 사원식당을 위탁 운영한다. 아내는 지금처럼 본사에서 일하기 전, 어느 중견기업 사원식당의 점장으로 파견 근무했다. 그 시절 아내 휘하에 조리보조원으로 일했던 분이 이곳 여사장님이다.


  손이 얼마나 빠르고 야무지셨다고. 아내는 여사장님을 진심으로 칭찬했다. 한 번을 요령 피우는 법 없이 위생장화를 신고 조리실을 동분서주하셨단다. 무엇이든 반드시 이룰 사람이라는 인상은 그때부터였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풋내기 점장을 어엿한 상급자로 대우해 준 것에 지금도 고마워한다. 마침내 문 연 식당에는 여사장님의 부군도 함께 일하신다. 근사한 은발 헤어스타일로 화부며 홀 종업원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뭐? 회사 그만두겠다고?! 다시 물었지만 내가 들은 게 맞는 말이다. 정정의 여지는 없을 것 같다. 애써 덤덤한 척한다. 너무 놀란 기색이었다간 공연히 아내를 서운하게 만들지 모른다. 남자의 기백, 남편의 담대함을 보여준다. 그만 둘만 하면 그만둬야지, 뭐 내 허락이 필요한가, 근데 무슨 일 있었어? 물어보는 내 표정이 이병헌 배우의 연기처럼 자연스럽길 바랐다.


  그지 같아서 못해 먹겠다. 줄이자면 그런 말이다. 일은 산더미 같은데 위에선 알아주지도 않는다. 후임 팀원들은 힘들게 뽑아 놓으면 금세 나가고, 최근엔 두 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냈단다. 이러다 나만 남을 것 같아, 내가 뭐 초인도 아니고 혼자 어떻게 다 하라는 거야, 화를 냈다 울먹였다 브로드웨이 모노드라마가 따로 없다. 마침 고깃집 노란 조명이 무드를 살린다. 내가 버틴 세월이 얼만데 어지간하면 이런 말 하지도 않아, 의미심장한 대사까지 들린다.


  결정적 기폭제가 된 일이 있었다. 엑소더스(Exodus : 기독교 성경의 출애굽기, 이집트 대탈출)의 시대에 아내의 팀장은 실언을 했다. 아내가 다른 팀 동료와 사담을 나누었다. 동료가 그러더란다. “있잖아, 자기(회사에서 흔히 쓰는 2인칭) 팀장이 우리 팀장한테 자꾸 밑에 팀원들 그만둬서 걱정이라면서 자기 팀 막내 J까지 그만두면 정말 큰일이라고 그랬대. 아니 그게 할 소리야? 사실 실무는 자기(아내)가 다 하잖아.” 아내의 멘털에 쩍 금이 간 순간이었을 터. 다리를 두 개나 건너서 듣는 나까지 부아가 치민다.


  외벌이가 될 때 되더라도 아내에게 점수 잃지 말자.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조건 아내 편이 되는 거다. “진짜 중요한 팀원 놔두고 애먼 데 가서 되도 않는 막내 걱정을 하고 있어. 회사 생활 말 공장인 거 모르나? 금방 여러 사람 귀에 들어갈 거, 뭐 그딴 말을 흘려. 그만둬.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없어져 봐야 귀한 줄 알지.”


  내 쪽에서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그랬더니 외려 아내가 제동한다. 일단 남편 의사는 어떤지 물어본 것이고 당장 실행할 건 아니란다. 휴우, 일단 다행이다, 아직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싶었다. 가만, 방금 너무 긴장 놓는 표정으로 광대 근육이 이완된 건 아니었는지 살핀다.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반려자를 생업의 혹독한 전선으로 내몬, 장렬히 산화할지언정 비겁한 후퇴는 없다며 끝까지 총포를 들게 한 비정한 지휘관(실제 나는 가정에서 그런 위치에 있지 못하다.)이 되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남은 평생 그 실점을 만회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 막내 팀원 J인가, 걔 일 가르쳐주지 마. 아니 아예 일을 주지 말자.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모르겠다만 팀장이 그 친구 그만둘 것만 걱정한다며.” 이보다 간결하고 정확한 설루션은 없다 싶었다. 한데 아내의 반응이 다시 엇갈린다. “그럼 J한테 업무 안 주고 나 혼자 다 하라고? 안 그래도 내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누가 오빠한테 그런 해법까지 내놓으래. 역시 오빠는 내 사정을 잘 몰라! 으이그.” 난 열심히 편들어준 것뿐인데 내가 뭘?!


  이러다 우리 싸움 나겠다, 이럴 거 없잖아. 아내를, 동시에 나를 진정시킨다. 그만두겠다는 얘기 처음일 정도로 회사 다니기 힘들다는 것 알겠고, 정히 그러면 그만두면 될 일이고, 그만두기 전까지 최대한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해준 얘기고, 그만두면 아껴 쓰면서 나 혼자 벌어서도 어찌어찌 살 거고, 그러다 일 찾으면 다시 출근하면 될 테고. 뭐가 걱정이냐, 우리가 왜 티격태격 하느냐 다독였다. “편들어 주는 거 알겠는데, 편들어 달라고 한 얘기 아니었고 또 애꿎은 후배 J한테 일을 주네 마네 하니까 그런 거잖아. 오빠는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간단한 걸 너는 왜 모르느냐, 나무라는 것 같아서.” 아,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애가 중학교 갈 때까지 같이 살아도 도무지 모르겠구나.


  새로 시작하는 월요일, 아내는 아무 일 없이 출근했다. 점심 먹고 회사 탕비실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무슨 일? 점심 맛있는 거 먹었느냐, 어제 얘기하고 나서 오늘 폼 나게 사표 낸 거 아닐지 궁금해서 해봤다고 말했다. 아내 말하길, 자기도 계속 그쪽으로 궁리하다 진짜로 실행에 옮길 것 같아서 확실한 해법을 찾았단다. 나 어디게? 글쎄 모르지, 반차 휴가라도 내셨나. 아니란다. 회사 근처 은행에 이율 좋은 적금 상품이 나와서 아이 이름으로 가입하러 왔단다. 그러고 나면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 쏙 들어갈 것 같아서 왔는데 마침 기다리는 중이란다. 나 부른다, 이따 저녁때 집에서 봐, 끊을게, 하고 끊는다.


  맞벌이에서 외벌이로 소득 체계의 급전환 위기가 일단락됐다. 그렇더라도 아내가 요즘 정말로 일이 힘들구나 하는 건 알았다. 나라도 속 썩이지 말아야지. 뜻밖에 반작용으로 회사에 충성심이 작동한다. 만원 전철로 출퇴근하는 일상, 그렇게 시작하는 새해가 새삼 고맙다. 부인, 고깃집 사장님 내외처럼 우리도 백년해로, 아니 백년근로 해봅시다! 찬란하여라, 부부애, 동지애, 전우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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