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Dec 02. 2022

이 지긋지긋한 인사평가

  하반기 인사평가 기간이다. 학생 신분만 벗으면 인생에 더는 평가 같은 거 없을 줄로 알았다. 무슨 소리. 회사원도 한 해 두 번씩, 전반기와 후반기로 평가를 받는다. 직장인 라이프 어느덧 십 수년째. 무덤덤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매번 신경이 쓰이고 혹여 나쁜 등급이라도 받으면 몹시 불쾌하다. 아니, 나처럼 우수한 인재한테 고작 이따위 점수를 줘? 비운의 천재, 박해받는 선지자, 칭송받지 못한 영웅이 되어 며칠을 보낸다.


  회사에 인턴사원 여러 명이 들어왔다. 저 중에 몇 명은 정규직 신입사원이 된다. 나머지는 고향 앞으로. 비정한 시스템이다. 저들에겐 출근하는 매일과 매일이 평가일 것이다. 피평가자로서의 일상이라. 고달프기 그지없다. 불안해서 어디 잠이라도 발 뻗고 잘까 싶다. 아휴, 네들이 고생이 많다. 한데 얘들아, 그게 끝이 아니란다. 회사 들어와 봐라. 계속 평가받아야 돼. 계속.


  인생이 평가다. 사람은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가를 받는다. 이놈의 평가는 도대체 언제 끝날는지. 영혼의 안식을 얻어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터. 애석하고 야속하게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평가 아닌 평가를 받는다. 장례식장 풍경을 떠올려본다. 이 집엔 문상객이 얼마나 들었네, 저 집엔 근조화환이 몇 개나 왔네, 그 집 형제 자손은 위세가 어떻네, 하는 감상도 더러 나눈다. 불귀의 객이 된 혼백이 사바세계를 떠나지 못하고 그 같은 평가를 훔쳐 듣는 상상은 쓸쓸하고 측은하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 없듯 평가를 벗어날 수 없다면 나는 다만 그것이 공정하길 원한다.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팀원으로 일할 때다. 일시적으로 결원이 생겨 팀원 수가 줄었다. 새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남은 동료들과 네 일 내 일을 가리지 않고 분투했다. 팀장을 통해 지금 어찌어찌 일이 돌아가는 것 같겠지만 다른 회사에서는 몇 사람은 더 붙어줘야 할 수 있는 업무라고 인사부서에 피력했다. 그 해 인사평가에는 줄어든 팀원 숫자에 맞춰 누군가 또 최하 등급을 받았다. 이게 말이 되느냐, 평소 열 명이 하던 일을 예닐곱 명이 해냈으면 애썼다는 취지에서 최하 등급 없이 다 한 등급씩이라도 올려서 줘야지, 무슨 평가가 이렇게 합리적이지 못 하냐 따졌다. 사정은 안 됐지만 현재 체계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인사팀장의 답변은 근로 의욕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평가를 받는 것도 고되지만 하는 것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내가 속한 회사의 인사평가 방식은 상대평가다. 팀원 규모에 따라 최고부터 최하 등급까지 일정 비율대로 강제 배분한다. 팀원이 열 명이면 S등급 1명, A등급 2명, B등급 5명, C등급 1명, D등급 1명, 이런 식이다. 평가자가 평가 항목마다 점수를 주면 총점으로 합산된다. 그 점수로 줄을 세워 평가 등급을 자동으로 부여한다. 결정적인 업무 과실이 없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최하 등급을 받는다. 이게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팀원 모두가 훌륭하게 일 잘했는데 구태여 낙오자가 나온다. 팀장 입장에선 이번에는 네가 희생 좀 해라, 폭탄 돌리기를 만드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금번 하반기가 딱 그렇다. 팀원 여럿의 미세한 단차를 측정하는 것부터가 고비지만 면담 때가 걱정이다. 팀원 X야, 너도 훌륭했지만 다른 팀원들이 더더더 훌륭했단다. 이런 말로 어떻게 사람을 납득시키란 말인가.


  그런 와중, 상급자인 본부장은 팀장 여럿을 모두 불러 훈화 말씀을 하사한다. “여러분이 아시나 모르겠지만, 평가를 하는 것도 평가를 받습니다. 경영진은 팀장인 여러분들이 팀원들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그러니까 일 잘하는 팀원과 그렇지 못한 팀원에게 합당한 평가를 내리느냐로 팀장인 여러분들을 평가합니다.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팀장은 절대로 ‘위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하, 완전히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지만 이 무슨 가슴 먹먹하게 하는 소리. 지난 여섯 달 동안 개성 만발한 팀원들 어르고 달래 가며 일한 결과로도 본부장인 당신에게 평가받을 텐데, 팀원들 평가하는 걸로도 또 나를 평가하겠다니.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으나 한숨이 나오는 것까지는 탓하지 마시라. 게다가 그 말 중에 쓰인 ‘위로’. 나에게 필요한 건 그 위로가 아니라 다른 위로인 것을.


  이 땅에 모든 회사원을 위로한다. 평가받고 평가해야 할 이 시즌에 특별히 공들이고 힘주어. 그 모든 평가에서 벗어나는 날, 진정한 영혼의 안식이 선물처럼 안겨올 그날까지 이른바 킵 고잉(Keep going). 저기 인턴사원들 그쪽 팀장 부름에 네, 외치며 달려간다. 몇 달 뒤 네들 중 얼마는 남고 나머지는 가야 할 텐데. 난 눈 뜨고 그 장면 못 본다 못 봐. 야속하여라, 평가라는 두 글자여.

이전 06화 K의 쇼생크 탈출, 아니 퇴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