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덮인 산을 처음 갔습니다

오르는 발걸음보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벼운 산행

by 윤목

"몇 시야?"


"세시"


해가 중천을 넘어 일몰 맞이를 준비할 시간이었다. 밖에 나가지도 않은 집안에서 느껴지는 바깥의 한기 때문에 늑장 부리고 있다고 합리화해보았다. 사실 늑장의 포인트는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나에게는 골치 아프거나 힘든 일이 닥쳐와 생각의 정리를 위한 목적인 경우가 허다했다. 차가운 도시의 건물들의 근처에 한가로이 솟아 있는 산은 나에게 도피처의 의미가 강했다. 그런 도피처의 산을. 애정 하는 그녀와 함께 운동, 그리고 산의 오름 자체를 느끼려 하니 어색함이 다리 끝부터 전해져 왔다. 그래도 눈 덮인 설산을 눈으로 보고 싶었던 속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함께 뽀드득 거리며 산을 뒤덮은 눈들에 우리의 발자국을 새기고도 싶었고.


"청계산까지 한 30분 정도 걸리겠다."


차에 탄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도착하면 3시 30분, 5시 30분이 일몰이니까... 한 시간 오르고 한 시간 내려오고... 오늘 금요일이라 돌아오는 길은 차가 막히겠네'


무엇에 그리 쫓기며 살고 있는지 도착하기도 전에 돌아올 걱정을 하는 나란 사람이 참 애잔했다. 산으로 가는 길 내내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그녀도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서로의 마음을 공명 시켰다. 서로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온 것 같다며 너스레도 떨었다. 한 8~9곡 정도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 지나갔을까. 반가운 청계산의 입구가 눈에 보였다.


20대 초반에 눈 덮인 한라산을 운전하며 지나갈 때 빼고는 성인이 되어서는 처음으로 보았다. 설렘 가득한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오랜만에 동네 산책이 아닌 바깥바람을 쐴 수 있다는 설렘에 가득 차 한껏 밝아 보였다. 이윽고 드디어 한 발자국을 내 딛었다.


'뽀드득'


회색빛의 아스팔트의 경계가 끝나고. 산의 입구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260미리의 발바닥과 153ha의 청계산 바닥에 쌓인 눈이 만들어낸 소리가 났다. 달에 첫발을 디딜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신이 난 나는 연신 왼발 오른발을 바꾸어가며 잦은 발소리를 내어 보았다.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늘 먼발치에서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던 눈 덮인 설산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아빠랑 산을 갔었어"


"어 정말? 나도!"


산을 오르던 우리는 마치 새로운 공통점이라도 발견한 듯 어린 시절 산에 오른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나는 반 강제적으로 아빠와의 산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마지못해 따라서 집을 나서는 내가 대견스러웠는지.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나와 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너스레를 떨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 시절 나의 낯빛은 생각지도 않은 채 나 역시 뿌듯해할 거라고 생각했었을 지도. 물론 산에 오르던 날들이 싫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아빠와 산에 오른다며 맛있는 간식거리를 챙겨주시는 어른들도 있었고. 훌륭하다, 멋지다, 착하다 등 어린 시절의 나에게 달콤한 말들이 낯선 이들의 입에서 나와 나에게 들어왔을 때 우쭐해하던 나 역시 좋아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아빠가 좋아하던 산은 고등학교에 들어 입시 준비를 하면서 중단되었고. 그 이후로도 나는 아빠와 산을 간 적이 없었다.


'아빠랑 산에 가자고 해봐야겠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상하게 혼자 있을 때는 아빠에 대한 생각도, 엄마에 대한 생각도 잘 나지 않는 편인데. 그녀와 함께 무엇인가를 하다 보면 가족과도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들어오는 것은. 나이를 먹어가서 일까.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첫 만남 때부터 줄곧 나와 함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부모님이 보고 싶다기 보단 함께 무언갈 해야겠다 라고 다짐하는 편이지만. 둘 다 평소에 생각지 않아왔던 부모님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미 서로를 가족으로 맞이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산에 오르고 내려오는 내내 우리는 서로의 단단해 짐에 대한 이야기를 줄곧 이어 나가며 걸었다. 그저 겨울의 새소리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대는 겨울의 바람 소리 그리고 쌓이고 얼어버린 눈과 얼음 아래에 나지막이 흐르는 계곡물의 소리만 들려대는 설산의 고요 속에 서로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지막이 풀어놓았다. 나지막이 풀어놓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어깨를 조금 더 가볍게 해서였을까. 그녀는 잘 몰랐겠지만. 적어도 나의 발걸음만큼은 산에 오를 때 보다 내려온 후 한 없이 가벼웠다.


유튜브에서 만나는 sluelife : https://www.youtube.com/channel/UCIa2L3-lG_lUxZ4dAkge4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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