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하고 싶지만 그렇지도 않은 마음
“거울을 잘 보지 않는 것 같아”
컴퓨터 책상에 멍하니 앉아 글감을 고민하던 어느 날 문득 그녀가 나에게 내뱉은 말이다. 거울을 원래 자주 봐야 했던 것인가? 싶었다. 물론 집에 거울이 없지는 않았다. 거실에 전신 거울도 하나 있었고. 화장실에도 큰 세면 거울이 붙어 있었으니까. 혼자 사는 사람의 집에 이 정도 거울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녀가 나에게 꺼낸 이야기는 거울을 보는 행위를 잘 안 한다는 것이지 거울이 없다거나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나도 모르게 전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시간은 이미 느지막한 오후였건만 그날 처음으로 거울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은 흔히 외모가 잘 가꾸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거나 가꾸기 위한 과정을 보며 고쳐가기 위함이지 않을까. 그러니 나는 거울을 볼 일이 많지 않다. 외출을 하지도, 해야 할 이유도 많지 않고 그저 컴퓨터 앞과 침대에 누워 있으니 가꿔야 할 필요가 없다. 잠시 그녀와 산책이라도 할 때에는 기름 낀 머리는 모자로 가리고 얼굴의 수염은 마스크로 가리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늘 외모를 가꾸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면도 때문에라도 일정한 주기로 가꾸어 준다. 그래도 사랑하는 이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다.
곰곰이 거울 보며 혼자만의 사색에 잠긴 나는 거울을 보통 어느 때에 보는지 생각해 내려 애쓰기 시작했다. 마땅히 생각나는 것들은 없었지만 얼굴에 뾰루지가 났다거나. 면도할 때 구레나룻과 머리털의 경계를 지어야 할 때 정도에나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확인했던 경우들은 곧잘 떠올랐다. 거울을 보며 남자들은 흔히 ‘이 정도면 잘생겼지’라는 생각을 한다고들 한다. 그럼 나는 흔한 남자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나는 내 외모에 만족한 적이라곤 단 한순간도 없었다. 더군다나 살이 쪄 오른 뒤에는 더더욱.
거울을 볼일이 없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외출할 일이 많이 없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그만큼 꾸며야 하고 꾸밈을 확인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삶이 좋다. 누군가를 구태여 가면과 이미지를 만들어가면서 살지 않고 싶어 했고 만들어 살아봤지만 결코 행복하지도 않았던 삶에 환멸을 느낄 지경이었다. 땅을 향해 축 늘어진 머리카락에 중력을 거슬러 보겠다며 한껏 왁스를 발라 올려 보지만 이내 몇 시간 후면 머리를 간질간질하게 하는 꾸밈. 그 꾸밈은 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딘가 불편하게 간지럽혔다. 마치 새 신을 신어 뒤꿈치가 까끌거리다 살갗이 벗겨지는 것처럼. 어쩌면 사회에서 은둔되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히키코모리와 같은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집 문 앞을 열면 쌓여있는 쿠팡의 로켓 배송된 물품들과 비 마트의 식자재들을 그토록 반가워하고 기다리는 중인 듯 싶다. 집돌이가 되어서.
‘은둔하고 싶은 건 육체. 정신은 은둔하고 싶지 않아’
참 아이러니 한 말이다. 몸은 편하게 있고 싶고 생각은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인걸 보니 스스로 굉장한 욕심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얼굴을 내놓지 않고 유명해지고 싶어 한다. 과거에 얼굴 없는 가수들 몇몇이 유명했던 것처럼. 그들이 좋은 목소리와 노래로 유명세를 떨치고 많은 애정을 받았듯 내 콘텐츠인 글과 영상을 보고 나의 취향과 생각을 애정해 주었으면 한다. 그러고 나서 외모가 공개되었을 때 그 마저 정감 가는 인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은 희망일 뿐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을까. 물론 이 생각 때문에 보다 더 스스로를 지금 당장은 꾸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직 내 글도 영상도 좋아하는 이가 많지 않으니 당분간은 은둔 생활이 지속될 거니까. 너무 솔직한 마음은 뒤로하고 보잘것없는 외면보다 내면을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더 커서 그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의 합리화를 해 본다. 외모를 보고 사귄 사람과는 길고도 공감대가 형성되는 관계를 갖기가 힘드니 당연히 나의 글을 읽고 공감하려면 외면 보단 내면이 중요하니 말이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어?”
간혹, 아니 몇 주에 한 번씩 질문을 받는다.
“고요하게 살고 싶어 글 쓰면서”
늘 나는 대답했다. 고요하게 살고 싶다고. 정말 깊은 마음의 이야기는 소리 없는 아우성과 비슷하게 고요한 환호 속에서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글을 적어 그 글로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인 만큼 그러려면 글이 아주 유명해지고 여러 사람들과 공명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잡지라는 콘텐츠 업계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느껴온 바에 의하면 나는 지금 맨땅에 헤딩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유명인이 되고 나서 책을 내는 것은 쉽지만. 유명인이 되기 전에 책을 내고 오롯이 글로만 평가받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저 모두 소비해 버릴 뿐 온라인 상품들에 달리는 리뷰들 과는 다르게 콘텐츠는 보통 좋아요로 리뷰를 대신하곤 한다. 물론 어쩌면 나의 글이 타인에게 공명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날 선 비판이나 공감에 대한 댓글에 대해 갈망하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글을 올려놓고 보면 브런치든 인스타든 좋아요와 구독이나 팔로우 알림이 오면 무척 행복해하는 편이다. 한 번은 인스타에 알림 들을 확인하던 도중 메시지가 와있었다.
“글 엄청 좋으시네요...”
내 글을 좋아해서였는지 아니면 그저 공감되는 이야기들이라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기뻤다. 어떠한 사람이길래 내 글을 좋아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피드를 보니 자존감이 굉장히 낮아진 상태였었던 듯 싶다. 어쩌면 기본적으로 밝지만은 않은 나의 글에 공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메시지 하나 댓글 하나에 나는 조금 더 써도 되겠다는 힘을 얻었다.
글을 쓰는 삶. 그러면서 꾸준히 스스로의 브랜드를 만드는 삶. 누군가가 들으면 참으로 허황된 꿈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특히나 부모님의 경우엔 더 그렇다. 30넘은 아들의 마음에서 그간 해오던 것을 뒤로하고 글 쓰고 싶다는데 어느 부모가 선뜻 그러렴 이라고 말하겠는가. 내가 부모여도 쉽사리 납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중반부터 준비했다면 몰라도. 사실 나 스스로도 그 길이 아주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동반되어야 함을. 더군다나 주변에도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인지도 알리지 않으면서 누군가들에게 이목을 받게 되는 데에는 두배 세배의 시간이 걸리리라. 그럼에도 꾸준히 해 보려고 하는 까닭은. 고요하게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나의 대꾸에 늘 한결같이 돌아오는 대답 때문이다.
“몇 년 후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