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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목 Jan 21. 2023

혹시 비어있지는 않니


  오늘도 일기예보는 틀렸다. 그나마 따스한 것 같았던 하루의 공기가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어디가 동쪽인지 서쪽인지 가늠조차 힘든 빌딩 숲의 사이.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니 조금만 더 있으면 세상은 어둠에 잠식될 것만 같다. 회색 건물들은 부리나케 문을 열고 닫으며, 때로는 문을 힘차게 돌리며 사람들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그들의 얼굴엔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듯 피곤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얼굴엔 피곤함만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들의 얼굴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마무리하였음에 감사하거나 홀가분한 표정도 어려있다. 양가적 마음을 품은 그들의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걸음들이 지상을 어지럽힌다. 집으로, 회사로, 약속 장소로 제각각 향하는 발걸음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제각각인 발걸음 들이지만 어느덧 화음을 이루어 도시를 울리는 거대한 교향곡을 연주한다. 이런 것이 바로 무질서 속의 질서라는 것일까.


  얽히고설킨 그 발걸음들은 거대한 맞물림 들을 만들어낸다. 나 역시 그러한 맞물림을 만들어 내는 요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나와 그들의 차이점이라면, 그들은 나보다 한 계단 높은 인도에서, 나는 시커먼 아스팔트 차도 위에서 굴러가고 있다랄까. 움직임을 재촉하던 초록불이 빨간색으로 바뀌고 재촉하는 마음에 틈이 생겼다. 같은 방향을 향해 가던 것들이 일시에 잠시 멈춰 선 찰나. 여전히 분주함으로 가득 차있는 인도의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보다는 작지만 새빨간 것이 눈에 띄는, 몸통에는 하얀 제비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존재감이 느껴진다. 이름이 단순에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한 때는 익숙했지만 이제는 멀어지고 있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만든다. 처음 본 순간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우’라는 첫 글자를 여러 번 되새김질해 본다. 뒷 글자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다 한 순간에 생각날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처럼 재빠르게 이름을 낚아챘다. 우체통이었다.


  새빨간 색이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주변에는 간간이 담배를 피우는 이들이 기대어 필뿐. 분주한 이들 중 그 누구도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그 자리에 늘 서있는 것이 이미 익숙해져 버린 탓이리라. 우리는 모두 우체통의 쓰임새를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비단 빨간 우체통만의 비극은 아니었다. 집 1층에 있는 우편함에는 공과금 통지서들만이 가득하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담긴 우편보다는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이 우편함에 쌓인다.


  물론 어린 시절 우편함에도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이 우편함에 담겨있긴 했다. 가령 성적표나 학원에서 보내오는 안내문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그것들이 편지함에 들어있는 날이면 집에 그렇게 늦게 들어가고 싶을 수가 없었다. 좋은 내용이어도, 나쁜 내용이어도 돌아오는 것은 내용에 대해 아쉬워하는 소리들 뿐이었다. 어느 날엔가는 성적표를 몰래 아래칸에 있는 집 우편함에 옮겨놓았던 적도 있다. 우체부 아저씨가 실수한 것처럼. 그러나 그 아래칸 집에 사는 사람은 꽤나 꼼꼼한 성격이었는지 아빠의 퇴근길이나 엄마가 집에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아빠와 엄마의 손엔 옮겨놓았던 성적표가 들려있었다.


  그렇다고 우편함은 늘 피하고 싶은 것들로만 가득 차있지는 않았다. 손꼽아 기다리게 만들던 편지들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 한 친구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녀석과 나는 꽤나 친한 사이어서 학원이 끝난 후 떡볶이도 곧 잘 사 먹곤 했었다. 미국으로 떠나던 날 녀석은 나에게 약속했다. 미국에 도착하면 항공우편으로 나에게 편지를 보내 주겠노라고. 나는 녀석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고 있을 동안에도 행여나 항공우편이 오지는 않을까 하는 설렘을 느꼈다. 그러나 우편은 생각보다 빠르게 오지 않았고 녀석은 미국이 너무 좋아 나에게 편지를 써 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섭섭함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혹여나 우체부 아저씨가 실수로 다른 집 우편함에 편지를 넣은 것은 아닐까 싶어 우리 라인의 모든 집들의 우편함을 뒤적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을 때였다. 우편함에는 다른 우편들과는 사뭇 다른 빨갛고 파랗게 알록달록한 우편이 하나 꽂혀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항공 우편이었지만 나는 단숨에 알아챘다. 녀석이 보낸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미국에 도착해서 집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이야기. 누나와 방을 따로 쓰게 되어 (한국에서 녀석의 불만은 누나랑 방을 같이 쓰는 데 매일 저녁 누나의 코 고는 소리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너무 행복하다는 이야기. 내년 겨울 즈음에 한국에 잠시 들어가니 밥이나 먹자는 이야기. 두 장가량의 꽤나 긴 편지였지만 별 내용은 없었다. 그래도 꽤나 즐거웠던지 미국의 풍경이 담긴 사진 몇 장도 편지와 함께 들어있었다. 그 편지를 시작으로 나와 녀석은 꽤나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녀석이 고등학교와 대학교도 미국에서 진학하게 되어 첫 번째 겨울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 변해가는 얼굴도 모르는 사이가 되어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편지에 대한 기다림도 멎었다. 사실 녀석과의 이별은 그 아이가 미국에 가기로 결정되었던 순간 이미 기정 사실화되어 있었을 테다. 갑작스러울 수 있었던 이별이었지만 우리는 편지를 통해 그렇게 서서히 이별에 스며들어갔다.


  은은한 기다림을 선물하는 정거장의 역할을 하던 우체통 안에는 이제 무엇이 담겨있을까. 그 큰 배 안에는 더 이상 누군가들이 기다리는 것들이 들어있기나 할까. 받기 싫은 것들로 가득하지는 않을까. 외따로이 서있는 우체통이 씁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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