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와 30대의 어느 시점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약대를 졸업한 아주 똑똑한 친구였다. 그 친구는 전형적인 이과생 MBTI는 ISTJ, 나는 미대를 나온 INFP, 내 생각에 그 친구는 원래 ESTJ 같았다. MBTI가 하나도 안 맞는, 달라도 너무 다른 커플이었다. 특히 싸울 때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단 싸우면 그 친구는 연락을 끊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건지. 그냥 내가 꼴도 보기 싫은 건지. 아니면 헤어질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던 건지. 한번 물어볼걸 그랬다. 반대로 나는 조그마한 문제가 있으면 바로 풀어야 했기에, 대화를 필요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전화통화를 계속 시도했다. 우리의 싸움을 표현하자면 창과 방패의 싸움이랄까?
어느 날 싸움을 하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하루 종일 전화를 걸었다. 200번 이상 300번 정도 통화를 시도했던 것 같다. 여자친구는 훗날 나에게 말했다. 휴대폰에 찍힌 부재중 전화 200통을 보고 정말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론 헤어지지 않았다.
나도 특이하지만 그 친구도 상당히 특이한 친구였다. 어느 날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데려주었다.
문득 여자친구가 물었다.
"내 단점이 뭐야?"
단점을 물어보는 여자친구에게 나는 생각나는 단점을 모두 말해주었다.
"나 만나느라 힘들었겠네."
이 말과 함께 집으로 들어간 여자친구는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다. 여자에게는 진실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함께. 여자에게는 단점이 없다. 남자들은 반드시 기억하길 바란다.
그 친구는 싸우거나 화가 나면 연락을 끊었는데 언젠가는 내가 어떤 여자애한테 자격지심이 있냐고 물어봤더니 또 갑자기 연락이 안 되었다. 그게 기분 나쁜 일인가? 아무튼 그 친구의 자존심은 에베레스트의 어느 위치정도 되는 것 같았다. 내가 겁도 없이 자기를 좋아한 게 기분이 나쁘다고 하다가, 또 고맙다고 하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되는 말들을 여러 번 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프러포즈를 하라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우린 헤어졌다. 나를 만나면서 헤어질 것을 계속 고민하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다고 판단하고 결단을 내렸던 것 같다.
그 친구는 결혼을 하고 애가 둘이다. 나는 아직도 솔로로 남아있다. 솔로라는 단어를 보니 '나는 솔로다.'에 출연신청을 했는데 연락이 없다. 방송에 나갈 만큼 멋지거나 재밌거나 특이한 캐릭터가 아닌가 보다. 예전에 구청에 다닐 때, 구청직원 결혼 장려 차원에서 남녀 미팅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도 신청을 했지만 나이가 많다고 취소되었다. 그때보다 나이가 더 많아진 나는 결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몰려올 때가 있다. 한숨이 나오려고 한다. "포기하면, 게임은 거기서 끝"이라고 말한 슬램덩크 안감독님을 떠올리며 힘을 내보자. "아자아자! 한숨대신 함성으로! 포기대신 죽기 살기로!"
이미 애엄마가 된 예전 여자친구가 이틀 전 꿈에 나왔다. 부끄럽지만 데이트를 했다. 참 신기하다. 꿈속에서는 그 친구가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우린 연인이었고, 연인처럼 대화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예전에 사귈 때, 종종 그 친구를 엎어줬었는데, 꿈속에서도 친구를 엎어주었다. 잠이 깨고, 새벽에 교회에 갔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꿈생각이 났다. 창피하기도 하고 짜증도 났다. 헤어진 지 10년 정도 됐는데, 웬 꿈에 나타난 것인가?
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사랑했던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 헤어졌지만 분명 우리에겐 별빛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고 불꽃같은 분노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게 뒤섞여서 희미해지는 듯 하지만, 서로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사랑의 순간들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 사랑을 마음속 깊이 묻어 놓고 잊은 듯 살아갈 뿐이다.
최근에 나에게 200번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통화를 시도하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전화를 건다. 올해 2024년에 걸쳐서 계속해서-
그 여자는 어떤 건강검진센터의 예약 담당자다. 나보고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계속 전화를 한다. 나는 무슨 일이 있으면 최대한 미루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건강검진을 받을 해가 되면 12월이나 돼서야 신청을 부랴부랴 한다. 그 여자는 나에게 계속 전화를 했다. 낯선 번호이기에 처음엔 받아서 현재는 생각이 없다고 했다. 전화번호를 기억하게 되자 몇 달 전부터 받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전화를 건다. 건강검진을 안 받은 대상자의 명단을 확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전화를 거는 그 여자에게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끈기 있게 포기하지 않고 전화를 열심히 하니까, 그 병원에서 검진받을까?"
"아니야, 괘씸해! 내가 왠지 지는 기분이야! 기분이 나빠!"
두 마음이 동시에 들어 선택이 어려웠다. 현재로는 51%로 그 병원에서 검진을 받을 것 같다. 그런데 배가 고프거나 짜증이 나면 또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서 건강검진을 하기로 결정하는 그날이 돼 봐야 알 것 같다.
또 올해 전화를 계속했던 여자가 있다. 네일아트학원 상담직원이다. 뭘 하면서 먹고살지 고민하다가 디자인 전공을 살려 네일아티스트가 되면 어떨까 싶었다. 7급 공무원 출신, 심리상담 자격증도 있고, 미대도 나왔으니,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차별화된 네일숍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 상담을 신청해서 통화를 했는데, 학원비가 생각보다 꽤 비싸서 포기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잊을 만하면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했다. 미묘하게 형식적이며 장난스러운 말투가 느껴졌다. 몇 번을 계속 전화를 하기에, 네일아트 안 할 거니까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또 전화를 했다. 다른 남자 직원이었다. 남자직원에게 정중하게 안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또 여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한 번만 더 전화하면 개인정보 침해로 신고할 거예요."
알겠다고 하고, 또 전화가 왔다.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화가 났다. 이번에는 그 회사 홈페이지 개인정보담당자의 메일에 관련사항을 적어서 절대로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또 전화가 왔다.
"정말이에요. 진짜 전화하면 신고할 거라고요!"
내가 엄숙하고 진지하게 선포를 하자. 알아듣는 듯싶었다. 그런데, 또 전화가 왔다. 어린 목소리의 다른 여자였다. 이 여자는 처음 듣는 목소리 같아 화가 나는 마음을 자제하며 타이르듯 말했다.
"저 진짜, 한 번만 더 전화하면 정말 신고할 거예요. 전화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개인정보침해로 신고하면 업체에 타격이 클 거예요. 마지막이에요. 하지 마세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제는 전화하지 않겠지.
전화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전화통화를 오래 하다 보면 진이 다 빠지고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서 짜증이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화할 사람이 있다는 게 행복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전화할 친구가 있고, 전화할 연인이 있고, 전화할 가족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 일인가. 앞으로 여자 친구가 생긴다면, 싸우더라도 전화를 3번 이상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200번은 너무 심했다.
--------------------------------
ps. 그런데 반대로 200번의 통화를 그만큼 사랑한다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그래도 200번은 심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