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춘천, 청춘, 그리고 우리 3

우리 대장 써네

by 태리우스

to. 내 브런치를 읽는 유일한 후배 써네


이 편지를 언제 볼지 모르겠다. 써네야. 너에 대한 글을 쓰려다가 너는 내 브런치를 보니까 편지형식이 괜찮을 거 같아서 말이야. 너에게 처음 쓰는 편지지?


내가 학생회장이랑 맞짱 뜨고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을 때 내가 엄청 우울했었잖아. 나 때문에 다음날 또 집합걸려서 1, 2학년 모두한테 미안했었어. 집합 걸렸던 애들 모두 운동장에 모여있었는데, 내가 선배들한테 잡혔다가 나타나니까 환호하고 그랬잖아. 그렇게 1차로 모이고 2차로 우리 멤버들 따로 모였었지.


그때 왜 그랬는지? 내가 너네 집에 가서 잔다고 했잖아.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야. 왜 그랬을까? 아무튼 친구들과 헤어지고 넌 또 날 데리고 너네 집에 가서 날 재워줬지. 그때 혼자 있는 게 진짜 싫더라. 생각해 보니까 맞짱 뜨고 그러면 도파민, 아드레날린 같은 호르몬이 분비돼서 극도로 흥분상태가 되다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 우울 모드가 되는 것 같아.


근데 너는 무슨 생각으로 날 데리고 잤니? 넌 침대에서 자고 난 바닥에서 잤지. 폭풍 같은 하루를 보냈으니까 얼마나 고단했는지 난 바로 곯아떨어졌어. 남에 집인데 중간에 깨지도 않았어. 난 세상모르고 잤는데 넌 그때 잘 잤니?


내가 아침에 일어나자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갔지. 그리고 불꽃놀이 하듯 푸다닥 팍팍 소리가 났어.

나는 최대한 조용히 조심스럽게 하려고 노력했었어.

그런데 전날 먹은 치킨 때문인지, 아니면 그 난리를 쳤으니 뱃속이 요동을 쳤던 거야. 난 네가 자고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너는 자는 척을 하고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지. 날 배려해 줘서 고마웠어. 그런데 다음날 애들한테 다 얘기했잖아! 내가 그런 소리 냈다고! 얼마나 창피했는 줄 알아? 생리현상을 공개하면 부끄럽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그때 왜 우리 멤버들 중에 왜 너네 집에서 자고 싶었을까?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네가 제일 편했었나 봐. 남자애들은 뭐 위로 같은 걸 해주지도 않을 거 같고, 그렇다고 다른 여자애들 자취방에 가서 잔다고 할 수 도 없을 노릇이고, 네가 한 살이라도 더 많으니까. 친구같이 편하기도 하고 약간이라도 어른스러우니까 기댈 수 있는 후배라고 생각했었던 거 같아.


왜 그러냐면 작년에 내가 돈이 없어서 점심도 못 사 먹었을 때 있잖아. 그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너더라. 네가 제일 편한가 봐. 돈 없으면 꾸고 싶고 뭐 갖고 싶으면 사달라고 말하고 싶고 아무 거리낌이 없어. 마치 친누나처럼 말이야. 왜 그러지?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널 좋아하는 건 아니야. 우리 확실히 짚고 넘어갈 건 넘어가자. 사실 네가 날 조금 좋아하긴 했잖아. 하하하하하하하 솔직히. 난 다 알아.


생각해 보면 넌 우리 멤버들의 엄마 같았던 거 같아. 우리를 돌봐주는 엄마. 여자애들 중에서 네가 제일 언니였고 나를 포함해서 다들 개성이 출중한 애들이 모였는데 그 중심을 잡아준 게 바로 너였어. 티도 안 나게 깊이 흐르는 강물처럼 조용하게 우리를 이끌었던 진정한 리더는 바로 너였던 거야.


넌 참 대단한 친구야. 생각해 보면 도무지 하나로 뭉치기가 힘들 것 같은 애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했으니까. 할 말은 다하고 잔소리도 많이 했던 거 같은데, 기분 나쁘게 큰소리 한번 안치고 말이야. 너는 우리를 조율하고 중재하고 관리하고 조화롭게 해줬어.


나는 언제라도 뜬금없이 너한테 연락해서 밥 사달라, 스마트워치 사달라,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돈 없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친구 같은 네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너는 귀찮겠지만. 나는 남들한테 피해 주는 것도 싫고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말 못 하거든. 그런데 너한테는 자존심 같은 게 잘 안 생겨. 가끔 네가 내 카톡을 씹으면 조금 상하긴 하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학교 다닐 동안 네가 날 많이 이해해 주고 받아주고 보듬어준 거 같아. 내가 알게 모르게 말이야. 그게 무의식적으로 남아있나 봐.


사실 내가 모난 부분이 많잖아. 네가 말했듯이 사람도 엄청 가리고, 밉고 얄미운 짓도 많이 하고, 삐지기도 잘하고, 사고도 치고, 그리고 어디 놀러 가면 옷도 훌렁훌렁 벗어서 노출증 환자라고 했었잖아. 아무튼 내가 난리를 칠 때 네가 중간에서 중재를 많이 해준 거 같아. 애들과 나 사이에서. 네가 중심을 잘 잡아줬어. 맞지? 그렇지?


“그걸 이제 알았냐?”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배고플 때 도시락 쿠폰도 보내주고 장사한다고 보증금 빌려달라고 할 때는 안 빌려주고, 내가 사달라는 건 한 번도 사준 적이 없고, 요즘엔 내 카톡도 가끔 씹지만,

나는 네가 참 편하단다. 이 편지를 쓰면서 또 너한테 뭐 사달라는 카톡을 보냈는데, 네 답장이 궁금하다.


근데 나 궁금한거 있어. 나 휴학하고 너 4학년 때 연애하면서 왜 학교 안 나온 거야? 나 진짜 궁금해. 수업 엄청 빠졌잖아. 졸업은 어떻게 한 거야? 대학 수업이 얼마나 된다고 수업을 빼먹냐? 도대체 뭐 했어? 나 진짜 궁금해.


또 궁금한 거 있어. 너 고등학교 때 증명사진 생각난다. 아주 예뻤지. 아마 우리 과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 탑 먹을 수준으로 예뻤어.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왜 이렇게 됐냐고 내가 약 올렸던 거 기억나지?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학교 다닐 때는 내가 더 디자인 잘했던 거 같은데, 아지까지도 현역 디자이너로 일하는 모습 정말 멋져!

진짜 대단한 거야! 훌륭해! 역시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이 맞아. 너는 강한 여자야! 그리고 아주 좋은 리더야. 마음이 넓고 따뜻해.


요즘에도 술, 담배 많이 하니? 나이 생각해서 줄여.

너네 집에서 나한테 담배 걸려서 당황했었잖아. 하긴 마약 같은 거 안 하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설마 마약은 안 하지? 하면 신고한다.


우리가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었어. 참 그때 기억나?

우리 제주감귤 집에서 영화 보고 놀 때, 내가 오징어 굽다가 젓가락이 달궈진지도 모르고 뜨거운 젓가락을 만져서 놀라면서 방귀 뀌었었잖아. 그때 너 있었나?


넌 보드람치킨과 비빔면을 함께 먹는 걸 좋아하지. 난 요즘 초가공식품을 웬만하면 안 먹어. 그래서 살이 빠졌어. 그래도 우리 다음에 만날 때는 네가 좋아하는 보드람치킨에 비빔면 한번 먹자. 네가 해줘.


그러고 보니, 너는 2007년에 졸업하고 나는 2008년에 졸업했으니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거야? 말도 안 돼! 그런데 우리 얼굴 본 게 10번도 안된 거 같은데? 그런데도 네가 이렇게 편하다니? 이건 기적이다! 그렇지? 사는 게 너무 바빠도 시간을 내서 봐야지!

애들이랑 1년에 한 번은 봐야지. 이러다 50대 되서만나는 거 아니야?


우리가 졸업하고 잘 못 뭉치는 이유를 알겠어!

그건 바로 내가 말했듯이! 네가 중심을 안 잡아줘서 그래. 우리의 진짜 대장은 바로 너야! 네가 우리의 리더라고!


그리고 넌 꽃다발의 안개꽃이야. 풍성한 안개꽃,

우리 멤버들이 모두 색깔이 화려하고 다양하잖아. 그 애들을 모두 아우르고 어우르고 하나로 묶어줬던 우리의 안개꽃이란다.


안개꽃 같은 써네야. 나는 너 앞에서는 언제나 철없는 오빠로 남고 싶다. 철들지 않을 거야. 너 앞에서는. 늘 이해해 주고 받아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그래주길 바랄게. 약속하자!


그리고 왜 시집 안 가니? 설마 나 기다리는 거 아니지? 우린 이루어질 수 없는 거 알잖아. 넌 날 좋아했지만 말이야. 크하하하하하


우리 써네가 이 글을 언제 읽을지 모르겠다. 벌써 9월 말이다. 2025년도 3개월밖에 안 남았어. 날씨가 추워졌는데 옷 따뜻이 입고 월급날 되면 꼭 연락하고. 오빠 맛집 좀 데리고 다니고 해 줘. 부탁할게.

플리즈~~~~~~너 돈도 잘 벌잖아.

그럼 우리 대장 써네, 굿나잇~~!


from. 네 인생의 유일한 노출증 환자 태리우스 오빠


제목-없음-21.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춘천, 청춘, 그리고 우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