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로하 Sep 28. 2023

규칙을 따를 때와 잊을 때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 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받은 안무는 그동안의 안무와는 전혀 달랐다. 음악부터 달랐다. 그동안 공연했던 음악은 발라디*면 발라디, 샤비**면 샤비 등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리듬과 느낌의 음악이었다. 그런데 솔로용으로 받은 안무의 음악은 발라디로 느리게 시작했지만 도입 부분에서 빨라졌다. 거기에 중간에 드럼 박자까지 들어간 복합적인 음악이었다. 이런 곡에 맞춰 안무는 느리다가 빨라지고 다시 드럼 박자에 맞는 동작을 넣는 등 복합적인 춤이 되었다. 한 명이 춤을 추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하려면 이렇게 구성해야 한다고 했다. 솔로용 곡은 2분밖에 안 된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혼자서 무대 전체를 사용해야 하니 동선도 길어지고 스텝도 많았다. 벌써 후회가 됐지만 이미 신청을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안무의 동작 하나하나 자체는 이미 다 배웠던 것들이었다. 난이도가 크게 높은 동작들이 아니라 어려울 건 없었다. 기초를 열심히 한 보람이 있어서 금방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음악에 맞춰 춤으로 연결하는 순간 삐걱거리고 어색해졌다. 선생님은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한다 하셨지만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만큼 답답했을까?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어이없게도 그 당시 읽던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의 <신화와 인생>에서 답이 보였다.


발레를 하는 사람들이 바(bar) 연습을 하는 과정에는 심미적인 것이라곤 전무하다. 춤을 추기 시작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규칙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런 와중에 작품을 고안한다. 하지만 마침내 규칙이 녹아 없어지고 자연스러운 충동이 주가 된다. 예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오랜 속담이 있다.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규칙들이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녹아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교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은 춤에 관심이 매우 컸다. 게다가 그의 아내 진 애드먼(Jean Erdman)은 20세기를 대표하는 훌륭한 현대 무용가이자 안무가였다. 덕분에 조셉 캠벨은 그 자신이 춤을 추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춰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나는 머리로 이해해야 몸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이 글을 읽자 뭐가 문제였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음 연습 시간부터는 규칙을 잊으려고 했다. 네 번 움직여야 하는 안무라면 전에는 어떻게든 규칙대로 하려는 바람에 박자를 놓치고 다음 동작도 제대로 못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음악에 맞춰 여유 있게 세 번만 움직이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선생님도 오히려 자연스러워졌다며 그냥 넘어갔다. 그러다가 익숙해지면 다시 네 번 움직이면 되니까. 중요한 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지 동작과 규칙을 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규칙을 잊고 순수한 행동 속에 녹아드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대회 날짜가 다가올수록 한계는 분명해졌고, 결국 안무를 조금 고치기로 했다. 조금만 고치기로 했는데 조금씩 조금씩 대회 전날까지 고치다 보니 결국 처음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안무가 되어있었다. 처음의 화려하고 복잡한 안무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맘에 들었다. 이제야 규칙을 잊는 것이 무엇인지 순수한 행동 속으로 녹아든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3개월가량의 연습을 마치고 드디어 대회 당일. 양구에 오전에 도착하기 위해 5시에 학원에 모여서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도착해서 화장을 해도 된다고 해서, 4시 반에 일어나서 세수만 하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결국 한 잠도 못 자고 일어났다. 양구에 도착할 때까지 자려고 차에서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오늘은 첫 대회일뿐 아니라 처음으로 가족이 보러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긴장이 되고 떨렸다.


* 발라디(Baladi): 이집트의 농촌에서 추던 민속춤으로서 20세기 초반에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주민들에 의해 현대 음악이 결합된 양식. 전체적으로 정적이고 무거운 느낌을 준다.

** 샤비(Sha'abi): 발라디에서 파생된 장르로 20세기 후반에 도시 노동자들이 추던 길거리 춤에서 유래. 전반적으로 빠르고 유쾌한 느낌을 준다.



그림 출처: https://www.nytimes.com/2020/05/06/arts/dance/jean-erdman-dead.html


이전 19화 새로운 도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