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3년 2월 하와이에서
"조셉과 진은 결혼 초기부터 아기를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진은 상관없었지요. 그녀에게는 ‘춤’이 아기였으니까요. 조셉에게 ‘책’이 아기였던 것처럼 말이지요."
- 낸시 앨리슨(Nancy Allison)
어느덧 마지막 공연의 마지막 순서만 남기고 있다. 알로하 실버벨리 무용단의 단장인 알로하가 그녀의 댄스 멘토, 진 애드먼(Jean Erdman)에게 헌사하는 공연이다. 1년 전 이곳 하와이에서 공연을 시작해서 1년간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했다.
마지막 공연은 역시 진 애드먼이 있는 하와이. 그녀의 120세 생일에 맞춰 축하 공연을 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쉬운 마음과 정성을 담아 그녀를 떠올리며 공연을 준비했다.
알로하가 벨리 댄스를 처음 했던 건 15년 전. 처음에는 그저 뱃살을 좀 빼려고 시작했지만 빠지라는 뱃살은 안 빠지고, 그녀가 벨리 댄스에 푹 빠져버렸다. 아마도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면서 몸에 균형이 잡히고 유연성이 늘면서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이 점점 예뻐 보여서였던 것 같다. 처음이었다. 그전에는 늘 불만만 가득했다. 키는 작고, 머리는 너무 크고... 팔, 다리가 조금만 더 길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아리가 조금만 더 가늘었다면... 찾아보려면 예쁜 곳도 있으련만 그녀의 눈에는 못생긴 곳만 보였다. 그런데 춤을 추면서 스스로의 몸이 예뻐 보였던 거다. 그토록 혐오했던 자신의 몸이 예뻐 보이자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기억조차 사라졌던 어린 시절의 욕구가 다시 살아나면서 답답했던 일상에 즐거움이 생겼다. 금방이라도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타고난 몸치였던 알로하는 연습으로 각각의 동작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건 가능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음악에 맞춰 안무를 할 때는 동작의 연결이 어설프거나 손발이 안 맞기 일쑤였고, 춤이라기보다는 기술의 나열 같아 보였다. "역시 나는 안 돼"라고 포기하며, 그냥 운동삼아 하는 걸로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연에 참가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공연일이 다 되도록 겨우 안무만 외우는 데 불과해서 이게 무슨 집안 망신이요, 흑역사의 창조냐며 후회했더랬다. 그런데 공연 당일 그녀의 어설픈 춤을 보면서도 친구들은 환호했고, 칭찬은 그녀를 춤추게 했다.
조셉 캠벨과 그의 부인 진 애드먼을 (책을 통해서) 만났던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그들은 춤에 있어서 안무나 규칙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충동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알로하는 그들 덕에 “우선 모든 규칙을 배운 다음, 그 규칙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그녀는 용기를 내어 강사 자격증에 도전했고, 공연과 대회를 즐기며 자연스러운 충동이 있는 삶을 살아왔다.
잠시 옛 생각에 빠져 있는데 관중들의 환호가 들린다. 조셉 캠벨이 그토록 중요하게 말했던 천복(bliss)을 찾은 느낌이 이런 걸까? 음악이 시작되자 알로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자 이제 모든 규칙을 잊어버리자,
자연스러운 충동으로 아름다운 무대를 즐겨보자."
- 2033년 2월, 진 애드먼의 고향 하와이에서...
몇 년 전 벨리 댄스를 시작하며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이다. 그때로부터 7년 정도 지난 지금 30% 정도 진행하고 있는 것 같다. 엉망이었던 첫 공연 후 조금 더 나아진 두 번째 공연을 했고, 그다음 해에는 대회에 참가했고 또 1년 뒤에 강사 과정을 이수했다.
첫 번째 자격시험에서 떨어졌지만 한 달 후에 한번 더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이제 정말 꿈을 이룰 일만 남아있는 것 같았더랬다. 4년 동안 얼마나 꿈에 다가갔을까? 자격증을 따자마자 몸져누워 몇 달간을 쉬어야 했다.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려 하자 이번에는 코로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했다. 이렇게 오래 쉬다가 다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기억이 난다 하더라도 몸이 다 굳어버릴까 두려웠다. 알로하 실버벨리의 월드 투어는 정말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오랫동안 쉬게 되자 괜히 강사 과정을 하느라 시간과 돈을 버린 것 같다는 후회가 들었다. 점점 초조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그래 이게 나다. 무엇을 하든 목표를 만들고 계획대로 추진해서 좋은 성과를 낸다. 덕분에 공부든 일이든, 심지어 취미로 하는 일도 대부분 잘했다. 지금 이만큼이라도 잘 사는 건 이런 성격 덕이다. 하지만 목표로 가는 길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성과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팀원이나 파트너를 배척했고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잘 사는 것 같아도 늘 외로울 수밖에... 알면서도 고칠 수 없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효율을 중시하는 어쩔 수 없는 최상주의자라 그렇다고 변명해 왔다.
벨리 댄스를 추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연, 대회 등을 목표로 준비하면서 비약적으로 실력이 늘었던 건 사실이다. 예쁜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박수받고 환호받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꿈을 이뤘을 때는 너무도 기뻤다. 하지만 정말 행복했던 건 무대에서 긴장을 하며 춤을 출 때가 아니었다. 홀로 때로는 동료들과 춤을 출 때, 음악과 춤에 몰입하느라 안무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연스러운 충동으로 춤을 출 때, 정말 춤을 추고 있는 걸 느꼈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실버 벨리는 목표이기도 하지만 노년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로 구성된 실버 무용단. 전공을 할 것도, 프로 댄서가 될 것도 아니기에 너무 열심히 연습할 필요도 없고 잘할 필요도 없다. 그저 춤을 추는 과정이 재미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다가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고 싶으면 공연을 하면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좁은 것 같으면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무용단을 못 만들고 월드 투어를 하지 못해도 좋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속상하지 않겠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공식적 목표는 무용단 만들기였지만 벨리 댄스를 하면서 여러 가지 배움과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나의 몸, 더 나아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또 몸을 움직이며 춤을 추는 행복을 깨달았다. 실버 무용단도 결국 이 행복을 같이 나누자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같이 춤을 추는 기쁨을 나누며 같이 늙어가는 친구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