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열 여행감독 Oct 02. 2021

부모가 자녀에게 꼭 알려줘야 할 '싸움의 기술'

싸움은 맷집을 길러주고 화해의 기술도 기르게 해 준다



엄마들 중에서는 아마추어가 드물고 아빠들 중에서는 프로가 드물다. 육아와 관련해서 그렇다. 중학교 3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 딸을 두고 있는 나 역시 아직 프로 승급을 못했다. 영원히 아마추어에 머물 뻔했던 나에게 육아휴직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때 ‘딸랑구와 친해지기’라는 미션을 수행하며 육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옛날 아이들은 친구들과 싸우는데 요즘 아이들은 엄마와 싸운다. 어깨너머에서 관찰해 본 내 결론은 그렇다. 아이들이 잘못한 것이 분명하니 그냥 일방적으로 혼내고 말 일 같은데 아내는 대화로 풀어보려다 싸우듯 대치한다. 아이들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를 늘어놓으며 엄마에게 대든다.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들과 친해지기를 나름 실천했을 때 가정상사께서 나에게 내린 명령 1호는 아이들과 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싸움은 자기 몫이라고. 싸우지 말라는 것은 혼내지 말라는 것. 혼내지 말라는 이유는 간단했다. 애들을 너무 잡아 족치지 말라는 것. 직업상 남이 말 안 되는 소리 하는 걸 못 참는데, 그런 주특기를 아이들에게 발휘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요즘 아이들은 친구가 아니라 엄마와 싸운다


하지만 아이와 엄마의 싸움을 지켜보면 답답했다. 그 싸움은 바닥 모를 수렁 같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짜증을 부리는 저 싸움은 무엇을 남길까, 답답했다. 싸운 뒤에 결과가 개선될 여지도, 사이가 더 좋아질 여지도, 무언가를 깨달을 가능성도 없었다. 끝없는 소모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싸움을 되도록 피하려고 한다. 싸움이 모든 번뇌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싸우지 않고 지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싸우지 않으려고 갈등을 피하는 게 모든 번뇌의 시작이다. 싸움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피하려고만 하다가 문제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엄마들은 “학교에 가서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누구와 가장 많이 싸우나? 누구에게 가장 화를 많이 내나? 바로 엄마다. 아이는 화를 내는 대상을 잘못 정했다. 처음부터 싸움에 대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다른 아이들과 그때그때 풀어내고 조정했어야 할 일을 쌓아두었다가 감정의 앙금을 엄마에게 푼 것이다.


엄마가 싸움의 대상일까? 세상과 싸울 때 마지막까지 내 편이 되어줄 진정한 아군이 엄마다. 그런데 그 엄마를 주적으로 삼는다?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은가? 싸움에 대해서 우리 아이들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고 있다. 단순히 싸움은 나쁜 것, 피하는 게 능사, 평화라는 평형상태에 도달할 것을 강요받으며 여러 강박이 생긴다. 이런 강박이 번뇌를 부르고 스트레스를 부르고 때로 이상행동을 부르기도 한다.


예전에 큰 아이가 울고 들어온 적이 있다. 친구들이 자신을 골렸다는 것이었다. 슬쩍 얘기를 들어보니 친구들이 못되게 놀린 모양이었다. 이럴 때 부모는 생각이 많아진다. 어릴 적 쓰라린 경험들도 복기되고. “친구들이 너에게 잘못하면 네가 친구한테 한마디 할 수 있는 발언권을 얻는 것이니 그 자리에서 네 생각을 말해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삼켰다. 다행히 반복되지는 않았다.


어릴 적 도 경계선이 지나는 마을에 살아서 옆 마을 아이들과 많이 싸웠다. 다른 도 아이들인 옆 마을 아이들이 외계인 같았다. 눈이 오면 눈을 뭉쳐 싸웠고 눈이 없으면 흙을 뭉쳐 던졌다. 마을 경계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는데 그 운동장을 두고 싸웠다. 그때는 그게 우리의 의무인 줄 알고 싸웠다. 세 명이서 열댓 명 되는 아이들과 싸운 적도 있다.


싸움은 꼭 이겨야 맛이 아니다. 맷집을 길러준다. 살아보니 그때 기른 맷집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맞아본 사람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지 계산이 선다. 안 맞아본 사람은 뭇매가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삼성 기사 삭제 사건에 항의해 시사저널 파업에 동참할 때 어릴 적 기른 맷집이 큰 기여를 했다.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중요하다


친구들과 싸워봐야 화해하는 법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엄마와의 싸움에는 이런 이득이 없다. 엄마는 굳이 화해하지 않아도 나를 늘 받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싸움을 회피하는 것은 화해의 기술을 익힐 기회를 잃는 일이기도 하다.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중요하다.


살다 보면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시사저널 파업이 나에게는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였다. 그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승패가 언제 어떻게 결정되는지 감을 잡을 수 없던 것이었다. 우리가 이 터널의 초입인지 중간인지 끝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 몰라 힘들었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줄어들었고 이에 비례해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 있는 명분도 사라졌다.


후회는 없다. 멋진 패배였고 다시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사주간지 정상에 다시 올라섰다. 만약 우리가 시사IN 창간에 실패했다면 파업의 추억은 악몽이 되었겠지만 다행히 우리는 부활했고 파업의 기억은 단골 술안주가 되었다. 파업 와중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퀴즈프로그램에 나가 우승했던 경험은 ‘모둠 과일안주’만큼이나 술자리를 풍성하게 해 주었다.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패배의 의무’를 수행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패배를 읽는 것은 바로 인생을 읽는 것이다


패배의 경험은 중요하다. 실상 우리의 인생은 패배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성공은 모든 조건이 맞아야 가능하지만 실패는 하나의 조건만 어긋나도 바로 직면하게 된다. 성공이 아니라 실패가 일상의 궤도 안에 있는 행성이다. 우리의 개인사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기억으로 점철된다. 성공이 명절 때나 먹게 되는 특식이라면 실패는 매일 먹는 일상식이다. 승리에 환희가 있다면 패배에는 그것을 뺀 모든 것이 있다. 패배를 읽는 것은 바로 인생을 읽는 것이다.


평화가 세상의 본질이 아니라 싸움이 세상의 본질이다. 인간과 인간, 개인과 조직, 인간과 환경은 싸우고 있는 것이 평형상태다. 평화는 싸움의 중간에 간주처럼 존재하는 불평형 상태다. 싸우지 않으려는 것은 삶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이다. 싸움에 대한 이런 정립된 생각이 오히려 싸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원효의 화쟁사상도 이런 맥락이라고 한다. 화평이 아니라 쟁투가 본질이라는 것이다. 뭔가 내가 사람들과 잘못 지내고 있는 것 같다, 뭔가 내가 세상을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이 잘못 싸워서가 아니라 싸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싸움의 역설은, 싸움의 본질을 알고, 싸울 태도를 갖추고. 싸울 방법을 아는 자가 싸움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전 01화 아이와 함께 나쁜 짓 하면서 친해지기, 태평육아 1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