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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Sep 29. 2021

아이와 함께 나쁜 짓 하면서 친해지기, 태평육아 1편

엄마들 중에는 아마추어가 드물고 아빠들 중에는 프로가 드물다


엄마들 중에서는 아마추어가 드물고 아빠들 중에서는 프로가 드물다. 육아와 관련해서 그렇다. 중학교 3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 딸을 두고 있는 필자 역시 아직 프로 승급을 못했다. 2년 전, 영원히 아마추어에 머물 뻔했던 필자에게 육아휴직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때 ‘딸랑구와 친해지기’라는 미션을 수행하며 육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2년 전 육아휴직 기간 동안의 제1 미션은 ‘딸랑구와 친해지기’였다. 3개월 동안의 육아휴직을 딸 덕분에 얻은 것이기에 이는 당연한 의무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딸아이가 그리 원하지 않는 미션이라는 점이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은 아직까지 ‘엄마 껌딱지’다. 아빠는 엄마라는 본 제품에 붙어 나오는 거추장스러운 부속품 정도로 여기는데 딸이 커 가면서 그 간극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아빠를 별책부록으로 여기는 딸랑구를 포섭하기 위한 전략은 '나쁜 짓 같이하기'다. 엄마는 절대로 안 해주는 일을 아빠는 해주는 거다. 첫째 아이와 친해질 때 썼던 방법으로 효과 만점이다. 첫째 아이 때는 주로 몰래 초콜릿 주기, 이 안 닦고 재우기 등이었는데 둘째 아이는 액체 괴물이다. 슬라임 재료 사주기로 아이의 환심을 샀다.


슬라임은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둔 모든 부모의 적이다. 하지만 나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기꺼이 적의 본거지로 향했다. 슬라임 카페에 함께 가서 놀아주고 딸이 간절히 원하던 세이빙 폼, 스무딩 젤 그리고 리뉴 등 슬라임 재료를 사 주었더니 딸아이와의 거리가 10분의 1로 줄었다. 김중배가 다이아몬드로 심순애의 환심을 사는 것에 비하면 훨씬 싸게 환심을 산 셈이다.



액체 괴물의 정체는 훨씬 전에 알았다. 딸아이가 보는 유튜브 동영상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슬라임의 기본을 익혔다. 이것 넣고 조물조물, 저것 넣고 또 조물조물, 그저 주물 거리는 화면이었는데 딸아이는 넋을 놓고 보았다. 무의미한 조물거림에 대한 무의미한 관찰은 딸아이와 함께 유튜브 동영상을 찍으면서 유의미한 경험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딸아이의 슬라임 동영상을 찍고 편집하고 유튜브에 올리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예전에 트위터에서 연애상담을 해주며 사람들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그때 어디서부터 연애인가, 연애의 규정을 놓고 사람들과 토론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연애를 몇 번 해봤냐고 물을 때 그들은 자의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연애 횟수를 밝힌다. 어떤 관계는 연애로 치고 어떤 관계는 연애로 치지 않느냐의 기준은 개인마다 달랐다. 연애를 구분하는 기준선에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집약되어 있었다.


어디서부터 연애고 어디까지 연애가 아닌가를 규정할 때 누리꾼들과 함께 만들어 낸 규정은 ‘둘만의 우주를 만들어 냈는지 여부’였다. 둘만 아는 사연, 둘만의 비밀, 둘만의 암호가 있는 둘만의 우주를 만들었는가가 연애의 구분법이 되어야 한다는데 대부분 동의했다. ‘둘만의 우주’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유튜브를 통해 나와 딸아이 사이에 우리만의 우주가 생겼다.



비록 그냥 막 찍어서 대충 편집해 올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어떤 내용을 찍고 어떤 자막을 달고 어떤 배경 음악과 효과음을 넣을지를 논의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둘만의 우주를 만들어냈다. 우주 치고는 비용이 적게 들었다. 동영상 편집 애플리케이션 구입비 12,000원, 리뉴와 쉐이빙 폼과 스무딩 젤 구입비 15000원, 총 2만 7천 원이 들었다. 유튜브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창조할 수 있는 우주다.


동영상은 짧든 길든 꼼꼼하든 어수룩하든 편집이라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편집이라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완결성을 도모하게 되어있다. 이 편집 과정을 통해 딸아이와 맺은 우주의 디테일이 정해진다. 그리고 한 편 한 편 올리면서 유튜브에 추억의 아카이브가 구축된다. 모든 정리 정돈에는 피할 수 없는 계기가 필요한데 유튜브 놀이는 추억을 정리 정돈하는 훌륭한 핑계다.


딸아이와의 유튜브 놀이가 재미있기는 했지만 결국 유튜브는 내렸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서 골목대장 혹은 골목 스타 노릇을 하며 산전수전 공중전 우주전 다 겪어 본 입장이라 이런 사생활 노출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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