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얻어서라도 빌려주는 사람

-한 지둥 두 가족의 기억-

by SeonChoi

빌려달라는 물건이 없을 때 남한테 얻어서까지 빌려주던 사람, 비가 쏟아져 물이 불어나는데도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익사한 사람이 있다.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기원전 1055~ 기원전 249) 사람인 미생고(微生高)이다.


미생고는 익사 하면서도 신의를 지켰도다

비록 한 시대 요절한 사람이나

이는 천 년의 공을 세운 길이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미생고는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약속한 사람은 오지 않고 큰 비가 내려 물이 점점 불어났다. 그는 다리 기둥을 붙잡고 기다리며 끝내 그 자리를 떠나지 않다가 익사하였다. 조선시대의 문신 장유(1587~1638)가 위의 시에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의를 지킨 그를 천 년이 넘도록 이어지는 공덕으로 칭송하였다.


약속을 지키려다 끝내 목숨을 잃은 미생고, 살아생전 그는 누가 빌려달라는 물건이 자기에게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얻어다까지 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공자는 “누가 미생고를 정직하다 하는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식초를 얻으려 하였을 때, 자기에게 없으면 없다고 해야 할 것인데, 굳이 이웃집에 가서 얻어다 주기까지 하였으니.”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후대의 학자들은 뜻을 굽혀 남에게 환심을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생고 역시 정직하지 못함을 공자가 지적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생색을 낸 것이니, 정직함을 크게 해친 행위라고 하였다.


돌이켜보니 내 가족의 행동은 미생고와 가깝다. 내가 중학교 때, 고등학생이던 오빠가 어느 날 엄마에게 진지하게 요청하였다. 친구 아버님이 가산을 모두 없애고 결국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자기 친구와 그 어머니가 갈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 우리 집 아래채에 들어와 살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평범한 서울의 단독주택이었던 우리 집은 방, 부엌, 화장실 등을 갖추고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편에 출입구가 별로로 구분되어 세를 줄 수 있는 이른바 아래채가 있었다. 엄마는 허락하셨고, 오빠 친구와 그 어머니는 흔한 말로 수도세 한 번 내지 않고, 마당 한번 안 쓸고 8년을 그곳에서 그냥 살았다. 8년 내내 엄마와 오빠는 아래채 아주머니와 오빠에게 단 한마디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8년이 흘렀을 때, 엄마는 아파트로 이사 계획을 세우셨다. 오빠 친구와 어머니는 그곳에까지 와서 방 한 칸에 살고 싶어 하였다. 이번에는 엄마가 반대하였다. 나 때문이었다. 별채로 구분된 공간이 아니라 장성한 오빠 친구가 아파트라는 공간에 20대의 딸과 같이 있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셨다. 아파트로의 이사를 계기로 이른바 한 지붕 두 가족은 비로소 흩어졌다. 그분들과 그 뒤로 인연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경제적 상황이 어떻든지 아래채를 세를 놓는 것은 가정경제에 큰 도움이었다. 그것을 온전히 포기하였지만, 엄마가 경제적 여유가 풍족해서는 아니었다. 그 일을 통해 어떤 이익을 구함도 아니고,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휘둘려서도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게 엄마와 오빠는 더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다. 그 경우만이 아니었다. 수시로 엄마와 내 오빠는 다른 이의 필요를 위해 식초를 구하러 뛰어가는 미생고를 넘어서는 미생고 같은 사람이었다.


선한 일을 할 때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네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모르게 하라도 아니고, 어떻게 다른 한 손이 모를 수가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나 스스로도 모르는 일처럼 베푼 것으로 만족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에게 베푼 일은 나 스스로도 모르는 일처럼 넘겨버려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사람이 어떻게 늘 현명하고 덕을 쌓으며 살 수 있으리. 남이 보기에 어리석을지 몰라도 내 엄마와 오빠는 그런 사람이다. 누군가 비판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내 가족의 성품이다.


글/그림 Seon Choi


※ 인용한 시 출처는 조선시대 문신 장유의 문집 《계곡집》. 한국 고전번역원 DB. 번역자 이상현.

서술의 편의상 번역은 필자가 다시 풀어 소개하였다.

미생고에 관한 이야기는 《논어》 공야장(公冶長), 《莊子 盜跖》 등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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