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어둠 속의 대화’에 대한 아주 심각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단순 스토리 누설 수준이 아닙니다.
해당 전시의 구조와 감성선은 ‘무지’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으므로,
전시를 실제로 관람하신 분 외에는 절대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관람을 고민 중이라면, 이 글은 북마크 해두었다가 꼭 관람 후에 읽어주세요.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한 번쯤, 아니 평생에 걸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은 디자인은 문제 해결이라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 해결이라는 말이 곧 디자인 그 자체는 않은가.
문제 해결은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디자인을 충분히 정의하진 못한다.
내가 오랜 시간 붙들어온 정의는 이렇다.
'디자인은 시각적 설득이다.'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 상대가 있고, 수용이 있고, 공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설득'이어야만 했다.
그 설득은 어디까지나 시각을 전제로 한다.
통상적으로 언어, 논리, 데이터 등을 기반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을 디자인이라 칭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5년간 전시공간을 설계하며 항상 눈을 바삐 움직여왔다.
동선은 시선의 흐름에 맞춰 계획했고, 공간의 설득력은 색과 형태, 소재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나의 정의는 북촌에서 처참히 무너졌다.
‘어둠 속의 대화’는 전시장 내부를 완전한 암흑 상태로 구성한 체험형 전시다.
입구에서 지갑과 핸드폰을 보관하고, 입장과 동시에 우리의 시력은 완전히 빼앗긴다.
눈을 감아도, 떠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수준의 어둠이다.
가장 앞에는 ‘로드마스터’라는 암흑 속의 길 안내자가 선다.
먼저, 일행끼리 팀을 만들고 팀명을 정하는 시간을 짧게 갖는다.
로드마스터의 음성을 따라 우리는 벽을 더듬고,
서로의 손도 잡아가며 빛이 완전히 사라진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전시의 구조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정교하다.
어둠 속을 걸으며 우리는 숲을 지나고, 모래를 밟고, 나룻배에 오른다.
폭포수를 맞고, 시장에선 물건을 만져 그 정체를 맞히기도 한다.
마지막엔 카페에 도착해 음료를 블라인드 테스트처럼 마신다.
눈으로 보이는 건 없지만, 우리는 분명히 ‘공간’ 안에 있다.
20분쯤 지나자 시각이 사라졌다는 불안함은 점차 옅어지고,
감각의 재정렬이 일어난다.
외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낯설던 촉감이 어느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감각이 된다.
이 전시는 단순한 ‘촉각의 전시’가 아니다.
정확히는 감각의 설계다.
어떤 벽은 거칠고, 어떤 소리는 멀리서 다가온다.
불안과 안심, 정지와 흐름의 경계를 설계한 이는 분명 존재한다.
나는 묻기 시작했다.
“이 전시도 공간 '디자인'인가?”
“시각의 설득이 전혀 아닌데, 어째서 디자이너의 의도가 느껴지지?”
시각을 잃은 공간인데도, 공간의 의도가 감지됐다.
촉감으로 감각을 설계하고, 음향의 거리로 동선을 조율하고,
암흑이라는 낯섦을 ‘안전한 체험’으로 만들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누군가의 깊은 기획과 직관의 결과였다.
비로소 내가 붙들어온 ‘시각적 설득’이라는 디자인의 정의를 다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디자인은 심상을 통한 설득이다.'
'심상'이란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다.
이 전시를 설계한 누군가는, 빛 없이도 관람자들을 설득하고자 했고, 성공했다.
이것은 분명히 완성도 높은 디자인의 성과물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시력이 불필요한 심상의 설계였다.
(※ 이 글은 전시의 주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반드시 관람 후에 읽어주세요 ※)
이 전시를 기획하고 설계한 사람보다 어쩌면 우리를 안내해 준 로드마스터의 역할이 중요했다.
암흑 속에서 100분 내내 우리를 웃게 하고,
안심시켜 주는 한 사람의 진행으로 모든 경험의 인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항상 내 옆에 있던 로드마스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밝고 경쾌한 사람이다.
우리를 처음 맞이할 때부터, 매 순간 유쾌하고 장난스럽게 공간을 안내했고,
어둠 속에서 “우리 OO팀, 잘 따라오고 있나요?”라며 웃음을 만들어줬다.
(여자친구는 놀이공원 아르바이트 경력직이 틀림없다고 했다)
우리 팀은 그 텐션에 자연스레 웃었고, 처음의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 전시가 이토록 재밌다고 느껴졌던 이유는,
그녀의 안내와 밝은 기운이 어두운 공간을 공포가 아닌
사람과의 대화에 집중하는 순간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질문을 주고받는 마지막 시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스터님은, 저희가 보이시나요..?”
전시 내내, 혹시 적외선 안경이라도 착용하고 계신 걸까?
너무나도 능숙하게 길을 안내하시기에, 그 궁금증은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때까지와는 조금 다른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최근에 시력을 잃었어요.”
“여러분도 이 공간에 처음 들어왔을 때 무섭고 답답하셨잖아요.
그런데 점점 익숙해지고, 새로운 감각들이 깨어나면서 다른 걸 보게 되셨죠?"
"저도 하루하루 빛이 점점 사라져 갈 땐 너무 무섭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못 보던 걸 오히려 보게 됐어요.”
그 순간, 모두가 숨죽였고
공기의 농도마저 달라진 듯한 정적이 피부에 내려앉았다.
전시를 ‘설계’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던 내 시선은 단박에 무너졌다.
나는 공간 디자이너로서, 수많은 전시를 만들며 늘 고민해 왔다.
‘엔딩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강렬한 반전 영상? 갑작스러운 감정 전환?’
킬링 콘텐츠와 와우 포인트는 늘 내 사고의 중심에 있었다.
이번 전시를 경험하는 중에도 역시나 피날레에 대한 기교적 추측을 했다.
'100분 동안의 암흑, 그 끝에서 무엇을 보여줄까?'
'불이 켜지며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것일까?'
'알고 보면 모든 공간이 흰색이라, 색은 보는 자의 감각에 따라 달라진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주려는 걸까?'
'암전 뒤, 시각을 폭발시키는 몰입형 영상을 트는 방식일까?'
나는 ‘설계된 감동’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전시엔, 그런 기교가 없었다.
로드마스터가 모두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
그것 자체가 이미 전시의 핵심 메시지였고,
그 어떤 연출보다 진정성 있는 전시였다.
상상력을 위한 여지를 남기듯,
끝까지 우리는 그 공간도, 그녀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전시가 끝나고 다시 빛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어둠 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둠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을 이끄는 사람이었다.
전시가 끝난 후에도, 나는 하루 종일 그 장면을 떠올렸다.
그녀의 목소리, 말투, 마지막 멘트까지 하나도 잊히지 않았다.
이건 체험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삶이었다.
현실의 파편을 마주한 경험이기에,
이 전시는 아직도 내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