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입구와 연희동 사이, 연남동은 서울 도심 안에서도 독특한 흐름을 갖는 동네다. 젊고 감각적인 유동인구가 많지만, 상수나 합정처럼 너무 빠르지도 않고 연희동처럼 조용히 물러서지도 않는다. 대신 그 균형 사이에서, 걷기 좋은 공원과 핫한 맛집들, 트렌디한 숍과 카페들이 밀집한 채로 뒤엉켜 있다. 주말에는 어디든 웨이팅이 길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잠시 들릴만한 공간이 필요해진다. 그럴 때 이 동네엔 특유의 ‘틈’들이 존재한다. 잠깐의 쉼표 같은, 아무 부담 없이 스며들 수 있는 공간. 그중 하나가 바로 네컷사진관이다.
한때는 인형 뽑기 열풍처럼 금방 식을 유행이라 생각했지만, 네컷사진관은 오히려 세대를 건너뛰며 확장 중이다. 과거의 사진은 기념이나 기록의 수단이었다면, 지금의 네컷사진관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자리매김했고, 놀이하듯 추억을 남기는 방식이다. 물론 2010년대 초 일본풍 부스 사진기도 있었다. 프린트된 사진에 네임펜으로 낙서하고, 인스타용 셀카가 대세가 되기 전의 그 감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법 자체가 달라졌다.
이 변화는 단지 유행의 교체라기보다는 경험 구조의 진화에 가깝다. 조명 기술은 얼굴을 가장 예쁘게 찍히는 각도로 맞춰주고, 무인 시스템은 어색함 없이 자유로운 진입을 가능하게 했으며, 각종 소품은 나다움을 입히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공간의 변화다. 예전에는 부스 하나로 기능이 다 했다면, 지금의 네컷사진관은 일종의 ‘공간 콘텐츠’다. 입장하자마자 이어지는 복도, 벽면을 가득 채운 타인의 사진들, 미용 도구와 헤어롤, 머리띠, 리본 같은 꾸밈 소품들. 사진을 찍는다는 동선 자체가 하나의 체험 루트가 된 것이다. 사진은 셔터를 누르는 찰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 이전의 준비와, 이후의 선택, 나아가 인쇄되는 결과물까지—전 과정을 경험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연남동 PIXX는 그런 진화의 흐름에서 한 단계 나아갔다. 대부분의 네컷사진관이 얼굴이 밝게 나오는 것을 강조하며 하이테크 한 톤 앤 매너로 치장되었다면, 픽스는 전면 우드톤으로 공간을 감싼다. 벽, 바닥, 조명, 기기까지 일관된 질감과 톤으로 마감되어 있어 마치 하나의 목재 상자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부스’가 아니라 ‘룸’이다.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개별 공간은 마치 작은 박스룸처럼 설계되어 있고, 그 안에는 각기 다른 크기의 프레임이 짜여 있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 정면으로 찍히는 구도, 자연스레 생기는 그림자. 이 물리적 틀이 오히려 자유를 부여한다. 우리는 공간에 몸을 맞춰 들어가며 포즈를 고민하게 되고,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주체가 된다. 몸을 구부리고, 기대고, 상자를 꽉 채우거나 비워내며 사진 속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아직도 이런 네컷사진관에 열광할까? 굳이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아도 되는 사진들을 왜 출력까지 해가며 보관할까? 그것은 디지털 피로에 대한 반작용이자, 우리가 잊고 있던 아날로그의 감각 때문이라 보여진다.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장의 셀카를 찍고, 그중 가장 예쁜 한 장만을 골라 SNS에 업로드해 왔다. 하지만 남의 피드에 내 얼굴이 어떻게 보일지, 어떤 느낌을 줄지 고민하는 행위는 점점 피곤해졌다. 하지만 네컷사진은 다르다. 여기는 ‘보여주기 위한 사진’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남기는 사진’이다. 출력된 종이를 손에 쥐는 오감적 경험, 함께한 사람이 사진에 남아있는 물리적 기억. 그 모든 것이 촬영이라는 행위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이런 맥락에서, 네컷사진은 바이닐 LP와도 닮아 있다. 음악을 그냥 듣는 대신, 턴테이블 위에 얹고, 먼지를 닦고, 표지를 만지고, 모으는 그 일련의 행위 자체가 음악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하듯이. 혹은 누군가는 좋아하는 아이돌의 앨범을 모으고 포토카드를 정리하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구조화한다. 네컷사진도 마찬가지다. 친구와, 연인과, 가족과, 그 순간의 우리를 한 장씩 남기는 것. 그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관계의 구조이자, 감정의 저장 장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 사각 프레임 속에서, 우리만의 시선과 역사를 만들어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피드 속에서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나의 서랍 속에서 ‘기억되는 나’를 남기는 방식으로.
PIXX의 우드톤 박스는 그 액자이자 무대다. 사각형 박스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는 순간 몇 초의 멈춤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감정적 쉼표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