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희예술극장, 무대와 객석 사이를 지우는 실험실

by 데이트베이스

연희동은 독특한 결을 가진 동네다. 아래로는 신촌, 연남, 홍대라는 밀도 높은 상권이 펼쳐지고, 위로는 조용한 주거지 홍제동이 잇닿아 있다. 그 사이에 놓인 연희동은 마치 전이 공간처럼, 활기와 정적이 교차하는 독립적인 리듬을 갖는다. 골목마다 오래된 한옥과 세련된 소품샵이 공존하고, 감도 높은 맛집과 카페가 외부 간판 없이 숨어 있다. 이 미묘한 밀도의 동네 끝자락에 자리한 ‘연희예술극장’은, 그 자체로 연희동의 감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다.


극장은 지하에 위치해 있지만, 진입 방식은 오히려 개방적이다. 지층에서 보면 난간 밑으로 간판이 보이고, 입구 앞 보이드 공간을 지나 계단으로 연결된다. 그 깊이는 충분히 지하의 고도를 만들지만, 천고가 높고 시야가 야외로 열려 있어 어둡거나 좁은 느낌 없이 진입하게 된다. 지하라는 상권의 조건을 은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고유의 깊이감을 전면에 내세운다. 스며들듯 내려가는 동선은 지하만이 줄 수 있는 몰입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경험의 도입부로 끌어들인다.

연희예술극장 입구


연희예술극장은 ‘가변형 화이트 박스’다. 정해진 무대나 객석이 없고, 공연에 따라 구조와 시야, 심지어 관람 방식까지 달라진다. 관객은 객석에 앉아서 극을 보기보다는, 공간의 일부로 들어가 예술을 감각한다. 화이트 큐브 전시장이 시각 예술을 위한 백색의 여백이라면, 연희예술극장은 종합 예술을 위한 감각의 여백이다. 말로만 ‘복합문화공간’이 아니라, 실제로 연극, 무용, 음악, 미술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들이 끊임없이 이뤄지는 실험의 공간이다.

연희예술극장의 다양한 공연 형태. 출처 : 연희예술극장


이곳의 관극 경험은 익숙한 형태를 벗어난다. 우리가 관람한 공연은 <아파트모먼트 시즌2>였다. 좌석은 총 2층 구조로 구성돼 있었고, 양쪽 벽면에는 3개의 박스형 객석이 각각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었다. 가로·세로·깊이 약 3미터쯤 되는 이 입체적인 좌석은 관람용 큐브였다. 1층은 무대와 같은 아이레벨에서 감상하고, 2층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바라본다. 각각의 박스는 정면과 후면이 뚫려 있고, 뒷면 통로를 통해 입장한다. 그래서 감각은 더 방 안에 들어온 듯 아늑했고, 동시에 반대편 박스에 있는 다른 관객과 시선이 마주치는 구조 덕분에 연극을 보면서도 서로를 의식하게 된다.

아파트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듯 연극을 관람하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관객-무대의 레이아웃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서사의 구조가 된다는 걸 보여준다. 무대 위 배우뿐 아니라 객석의 관객이 감각을 함께하는 이 구조는, 보통의 ‘무대’와는 전혀 다른 리듬을 제공한다. 연희예술극장에서의 ‘좌석’은 단순한 위치가 아니라, 감각의 층위를 바꾸는 장치처럼 작동한다. 각각의 입구, 입면, 시선 구조는 작은 문처럼 열리고, 그 문 하나를 통과하면 공간의 결이 바뀌고 감각의 밀도가 전환된다.

연희예술극장은 다양한 레이아웃과 관람 형태를 실험한다.


연희예술극장은 ‘카페 떼아뜨르’ 도 함께 운영된다. 관람객은 입장과 동시에 자유롭게 음료를 즐길 수 있고, 극이 시작되어도 관람 중 먹고 마시는 것이 허용된다. 관찰과 몰입보다 여유와 소통에 가까운 방식이다. 관객이 공간을 마주하는 태도부터 연극을 받아들이는 감정까지, 보다 일상적인 층위에서 예술을 감각하게 만든다. 조용히 침묵하고 정면을 응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듯 익숙한 일상의 리듬 안에서 예술을 경험한다. 이 극장이 자주 실험적인 공연과 다원 예술을 기획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의 프로그램 <환상가족 3.0>은 디지털 아트, 한국 음악이 결합된 다큐멘터리 극형식의 공연이었다. 특정 인물의 정신적 고통을 사회 구조와 연결 지어 서사화하는 방식으로, 그 장르는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연희예술극장은 이런 작품이 무리 없이 담기고, 자유롭게 감각될 수 있도록 공간 전체를 유연하게 제공한다. 공연이 있는 날마다 극장의 구조는 달라지고, 감정이 놓이는 방식 또한 매번 다르게 재편된다. 그래서 이곳은 ‘공연장이 딸린 복합문화공간’이라기보다는, 공연의 감각 자체를 설계하는 구조적 실험에 더 가깝다.

아파트먼트시즌2의 한 장면. 왼쪽의 배우들은 왜 대기중이지? 관객이다.


서울에는 수많은 복합문화공간이 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MD샵, 카페, 브랜드 체험존이라는 명목 아래 소비 지점을 분산시킨 구조다. 실질적으로 예술을 위한 공간, 특히 실험적 공연이 상시적으로 기획되는 극히 공간은 드물다. 연희예술극장은 그 희소한 예외다. 이곳은 극장의 형태가 아니라 화이트큐브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이 이뤄질 수 있는 여지를 설계했고, 내용보다 감각의 방식에 집중했다. 일상에서의 예술적 전이를 가장 자연스럽게 설계한 공간이자, 진짜 복합문화공간이다.


연희예술극장은 관객에게 잘 짜인 공연을 '감상했다’는 평면적인 경험보다, 무대와 객석 사이 어딘가에서 공연을 구성하는 감각의 '일부가 되었다'는 입체적인 인상을 남긴다. 경험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상상하게 만드는 실험의 무대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