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예훈 Feb 10. 2022

삶의 목적에 대한 물음

바이올린 플레이어 (1994)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이 단순하지만 철학적인 질문은 예술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물음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질문에 고뇌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화려한 극장에서 울리는 바흐의 음악과 어느 지하철 역 한 구석에서 들리는 바흐의 음악이 다른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여러분에게 예술은 무엇입니까?


파리의 바이올리니스트 아르망(Armand)은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로 음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정상급 연주자입니다. 하지만 점점 세속화되어가는 음악계에 환멸을 느끼고, 동시에 청중들과 공감하지 못하는 음악에 대한 자괴감으로 고뇌합니다. 결국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자신만의 음악을 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파리의 한 지하철역. 그곳에서 아르망은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연주 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정 팬도 생기고 자신의 음악을 찾아가는 듯 하지만 연주장소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결국 불량배들에 의해 바이올린이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결국 아르망은 녹음기에서 흐르는 자신의 연주에 맞추어 몸을 악기 삼아 연주를 계속하려 하지만 녹음기 마저 고장이 나자 좌절감에 이성을 잃고 환각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때 나타난 옛 친구가 아르망에게 바이올린을 건네주고, 그는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 혼신을 다해 연주를 시작합니다.


1994년 프랑스와 벨기에 합작으로 제작된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 (Le Joueur de Violon)'는 앙드레 오데의 소설 <무지칸트>를 원작으로 삼고 있으며 샬리 반 담 (Charlie Van Damme)이 메가폰을 잡고 리샤르 베리 (Richard Berry)가 주인공인 아르망 역으로 열연합니다. 특히 바이올리니스트를 연기한 리샤르 베리는 전공자의 눈에는 어설픈 감이 없지는 않지만 모든 곡에서 활과 운지법을 정확하게 연기해내어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실제 영화 속에 흐르는 바이올린 음악은 거장 ‘기돈 크레머’ (Gidon Kremer)의 연주로 그는 이 영화를 본 후 단번에 매료되어 영화음악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며 영화 전편에 걸쳐 그의 바이올린 연주가 흐릅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장면을 소개하면 먼저 영화 초반부 아르망이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리허설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직 연습이 시작되기 전 모든 악기들이 어수선한 가운데 아르망이 팀파니 주자의 연습 소리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카덴짜(Cadenza: 협주곡에서 독주자의 즉흥연주 부분, 지금은 대부분 작곡된 카덴짜를 연주합니다)를 연주하는데 실제 이 카덴짜는 현대음악의 거장인 독일의 작곡가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tke, 1934~1998)가 작곡한 것으로 아르망의 천재성을 멋지게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아르망이 레스토랑에서 음악을 세속 하게 여기는 천박한 지식인을 향해 조소와 분노를 표출하며 연주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사용된 곡은 벨기에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유진 이자이(Eugene Ysaye, 1858~1931)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의 1악장이며, 아르망이 지하철 역에서 거리의 첼로 악사와 이중주로 연주하는 곡 “Le Boeuf”는 2021년에 타계한 작곡가 블라디미르 멘델스존(Vladimir Mendelssohn, 1941~2021)의 작품으로 바흐의 샤콘느 선율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압권은 마지막에 흐르는 바흐의 샤콘느(Chaconne) 연주 장면입니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15분을 아무런 대사 없이 샤콘느 연주만을 위해 할애하는데 이 장면을 위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옛 친구에게서 새로운 바이올린을 받은 아르망은 지하철 역에서 다시 연주를 시작하지만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서만 모여 있는 이곳에 음악은 부질없다고 생각하고 이내 연주를 멈추고 맙니다. 그때 죽어가는 한 노인이 아르망에게 음악을 연주해달라고 애원하고 그는 바흐의 샤콘느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던 노숙자 노인의 눈빛은 다시 살아 오르고, 좌절에 빠져있던 흑인댄서는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상대와 손을 잡은 채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눕니다. 그리고 음악을 부탁했던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둡니다. 아르망의 음악이 이 지하세계의 사람들의 절망을 음악을 통해 희망으로 바꾸어준 것이며 그가 추구하려던 음악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다시금 예술과 음악에 대해 생각합니다. 예술에 대한 물음으로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시작했지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예술을 넘어서 '삶의 목적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끝을 맺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에 대한 물음..
이전 19화 너의 예술 안에서만 살아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