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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이 Jun 29. 2021

가장인 그


비몽사몽 이른 아침을 맞는다,  ‘언제쯤 개운하게 일어나 상쾌한 기분을 느껴볼 수 있을까?’ 남편도 나와 같은 야행성이라 아침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 보인다. 그의 꿈은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 나오는 자연인처럼 사는 것이다. 자고 싶을 때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그의 꿈은 앞으로도 몇 년을 지나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고3인 딸이 대학까지 졸업해야 무거운 가장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외모에서 시아버지가 보이고, 행동하는 모습에서 시어머니가 보인다. 무뚝뚝해 보이기도 하고, 살갑게 굴기도 하고, 잔소리도 제법 잘한다. 퇴근 후 바구니에 가득한 빨래를 보고는 “오늘 빨래 안 했네.” 라든가, 냉장고 문 열고 “이거 날짜 지나가네, 빨리 먹어야겠다.”는 둥. 그의 잔소리에 아! 잔소리라는 게 듣기 싫은 거라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된 나는 잔소리를 남편에게도 딸에게도 안 하는 편이다.      

그는 또 돈을 무척 아낀다. 오래된 옷도 버리지 않는다. 자연인 되면 입을 거라고 쌓아둔다. 몇만 원 지갑에 넣어주면 어느새 필요 없다며 다시 꺼내 놓는다. 카드 있으니까 됐다며. 나와 딸만 쓰란다. 마음이 짠하다. 능력 없는 아내를 만나 고생은 혼자 다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남편이 고생만 한 것은 아니다. 젊어서는 탁구도 치고, 주말이면 조기축구도 나가던 그는 항상 바빴다. 매일 혼자 잘 노는 남편이 미워졌다. 어느 날, 아이를 업고 지인 집에 가서 그의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 어스름할 때 집으로 들어가는데, 아내 아이 걱정은 고사하고 탁구 가방을 메고 발걸음도 가볍게 탁구장으로 향하는 그가 눈에 띄었다. 나는 아이 키우느라 힘든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맥주 한 캔 마시고 얼굴이 뻘게서 운동 끝나고 들어온 그에게 막말을 쏟아 냈다. 그에 건강하고 밝았던 모습이 지금은 그립다.

인생은 역전되기도 한다. 남편한테 탁구를 배운 후 건강도 좋아지고 재미도 느낀 나는 하루 두세 시간씩 거의 매일 탁구장에서 보낸다. 퇴근 후 힘들 텐데도 탁구장으로 가는 그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그는 퇴근 후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고 탁구장을 간다. 건강을 챙기는 모습이 고맙다. 

     

몇 년 전부터는 그에게 다른 취미가 생겼다. 택배가 며칠에 한 번씩 집 앞에 와 있다. 생수부터 세제, 도가니탕, 비빔밥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고르고 골라 꼭 가정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배달을 시키지만, 내 눈엔 반만 만족한다. 어쩌리, 이제 나이도 오십이 훌쩍 넘었고, 사는 재미도 젊을 때와 다르니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하고 제법 누나인 척한다.  

    

그가 하고 싶어서 하면 인정해 주고 응원해 주고 싶다. 아주 열심히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살았기에. 자연인 꿈은 정년퇴직하면 이루게 해 줄게. 고맙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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