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 속에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내가 왜 이 강의실에 앉아 있는지, 왜 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루는 사회학이론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흐르는 걸 발견했다. 딱히 슬픈 감정을 느끼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났다. 10분 정도 교실 구석에서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다 화장실로 도피해 다시 10분 정도 추스리고 교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10분 앉아있으면 다시 눈물이 흘렀다. 30분 주기로 이걸 반복하다보니 수업을 듣는 게 불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상태는 나빠지기만 해서 급기야 학교에 가고 친구들을 마주하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종강까지 한 달 남은 시점이었다. 그때까지는 학점도 좋고 수업도 열심히 참여했고 과제도 모두 제출했다. 한 달만 더하면 좋은 성적으로 학기를 마쳤겠지만 그러다간 내가 내 인생을 끝내버릴 것 같았다. 더이상 이런 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4년 하고 나면 뭐가 달라질까. 아마 또다시 버티기의 연속인 끔찍한 직장 생활이 기다리고 있겠지, 직장을 구할 수는 있다면 말이야. 지금도 삶에 그닥 의미가 없는데 대학을 졸업한다고 이게 나아지긴 할까. 어차피 고통 속에 버티다 죽을 운명인 거라면 그냥 지금 다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버스를 타면, 다른 승객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이대로 버스가 전복되어 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목숨을 끊는 것마저 스스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용기가 없구나,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죽고 싶었지만 적극적으로 나를 죽일만큼의 용기도 없는 내가 죽도록 싫었다.
학교를 안 나가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도 그만뒀다. 가족들은 내가 학교에 안 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원래 학교까지 편도 2시간 거리였기 때문에 아침 6시 30분에 버스를 타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갈 곳도 없으면서 명예퇴직 당한 가장처럼 6시 30분에 학교 가는 척 집을 나왔다.
11월의 아침 6시 30분은 캄캄했다. 돈도 없고 문을 연 곳도 없어 버스 정류장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옆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버스정류장에 왔다가 각자의 목적지로 출발했다. 8시에는 지역 도서관이 문을 열어서 그쪽으로 이동해서 졸았다. 오전 10시쯤부터 오후 6시까지 뭘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생활을 일주일 정도 하다가 새로 생긴 세탁방이 24시간 개방이라는 게 떠올라 버스 정류장 대신 세탁방에 갔다. 새벽이라 히터는 나오지 않았지만 충전기를 꼽을 수 있는 코드와 엎드려 잘 수 있는 테이블은 있었다.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집에서, 내 모든 문제들이 존재하는 한국이란 땅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한국은 내게 '현실'을 상징하는 모든 것이었다. 더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힘들어하는 데도 지쳤다. 눈앞의 모든 것들에 질려서 완전히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중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영어 인터뷰를 봐주시던 한 교수님이 물었다. 어떻게 위험할 수도 있는 몇 달 여행길에 혼자 나설 생각을 했냐고, 용기가 어디서 났냐고. 하지만 나는 떠날 용기를 낸 것이 아니었다. 더이상 한국에 살 용기가 없어서 도망친 것뿐이었다. 이대로 살다 스스로 삶을 끝장내든 일이 잘못돼 외국에서 납치당해 죽든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는 직감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죽기 전에 모험 한 번 해보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때는 타지에서의 죽음이 한국에서의 삶보다 덜 무서웠다.
문제는 돈이었다.
특정 목적지 없이 구글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외국에서 꽤 유명한 WWOOF와 Workaway라는 여행 웹사이트에 들어가게 됐다.
WWOOF는 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의 약자로 유기농 농장, 자급농 등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일을 주 25-30시간 도와주고 그 대가로 그들의 삶에 대해 배우며 숙식을 제공받는다는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여행 웹사이트다. 농장은 일손에 보탬을 받아 좋고 여행자는 숙식을 해결하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 좋다.
다른 하나는 Workaway라는 웹사이트다. 여기는 지속가능성보다 여행에 좀 더 초점을 맞춘 플랫폼으로 여행자는 호스트의 일을 주 25시간 도와주고 숙식을 제공받는다. 우프가 주로 농사일이라면 워커웨이는 농사일을 포함하여 베이비 시팅부터 페인팅, 노인 돌봄까지 호스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뭐든 다 올라온다. 워커웨이는 한 웹사이트에 가입하면 모든 국가의 호스트에게 메일을 보낼 수 있다. 한 번 가서 여러 나라를 보고 싶은 나에게는 워커웨이가 더 괜찮아 보이는 데다 농장뿐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지내보고 싶었기 때문에 가입비 $44(한화 약 5만3천 원)를 내고 1년 계정을 만들었다.
나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채식(당시 채식을 하고 있었다)을 키워드로 검색하여 괜찮은 호스트를 찾았고 호스트 프로필과 리뷰를 정독한 후 프랑스에 있는 호스트에게 먼저 메일을 보냈다. 자기 소개, 가고 싶은 이유, 희망하는 기간을 포함해서 정성 들여 쓴 메일을 보내면 첫 단계는 끝이다. 물론 열심히 써도 한 달이 지나도록 답장이 오지 않는 경우도 있고, 몇주 후에 답장이 오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여행 세 달 정도 전에 마음에 드는 호스트에게 메일을 보내 두 달 정도 전까지는 확실히 약속을 잡는 게 좋다.
그러나 워커웨이는 5성급 호텔에서 지내며 맛있는 거 먹고 예쁜 거 보러다니는 여행이 아니다. 편한 여행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관광이 아니라 죽기 전 한바탕 모험을 원했다. 그래서 겁이 나도 그냥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