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글로벌 인재 되기
미국, 스위스, 싱가포르에서 글로벌 마케팅, Product Director를, 한국에서 아시아 영업 총괄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운 글로벌 인재가 되는 방법을 적을 예정입니다.
돌아보면 MBA 생활은 어렵기도 했고 재미도 있었다.
처음에는 웬만한 외국인들 모두 자존심의 바닥을 경험한다. 나의 바닥은 수업 첫날 시작되었다. 미시간 주 앤아버 (Ann Arbor)에 있는 University of Michigan 경영학 석사 과정 (또는 Ross School of Business) 은 한 학년이 약 460명 정도이고, 6개의 반 (section)으로 나눠져 있다. 첫 수업인 미시경제학 (Microeconomics)을 듣기 위해 강의실 맨 뒤에 앉아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꽤 당당한 척하며 앉아 있었다. 교수님이 강의를 시작하니 자신감이 없어지다 90분 수업이 끝나니 바닥을 쳤다. 교수님의 말을 단 한 단어도 못 알아들었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나 뭐한 거지? 여기 잘 온 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꼴찌를 해 보겠구나.’
한 6개월을 겉으로는 당당한 척하며 지냈다. 그러다 룸메이트 언니도 많이 힘들다는 걸 알았다. 자꾸 나한테 화를 내길래, 어떻게 같이 살까 싶었다. 언니는 잘난 사람이었다. 서울대 출신이고, 회사 최초로 MBA 지원도 받은 초특급 엘리트였고. 자신감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언니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내가 별게 아닐 수도 있구나’라는 경험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고, 자만했는지도 깨달았다고. 당시 한국인 동기들과 외국인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이 무너지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게 우리를 더 성장시킨다는 것도.
룸메 언니는 6개월이 지나니 마음을 비우고, 즐기기 시작했다. 동기들과 열심히 놀러 다니고, 모임도 많이 나가고. 나는 놀 수가 없었다. MBA는 1학년은 회사 지원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다음 해 여름 인턴쉽을 할 회사를 구한다. 그 인텁쉽이 졸업 후 직장으로 이어지기에 1학년 때 열심히 면접을 보러 다닌다. 한국인 동기들은 한국파와 미국파로 나뉘었다. 한국파는 한국의 컨설팅 회사나 대기업을 노렸고, 미국파는 미국 회사들과 열심히 면접을 했다. 나는 미국파였다. 지방대 약대라는 학력이 한국 회사들에게 인상을 못 줄 거고, 학벌 좋은 동기들에 경쟁력이 밀리겠구나 싶었다. 졸업 후 3년은 미국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 끝에 어떻게든 미국에 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인턴 자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이력서도 많이 내고, 채용 모임에도 많이 나갔지만, 계속 떨어졌다. 다음 해 1월, 2월이 되며 대부분의 동기들이 인턴 회사를 정했다. 3월이 돼도, 1학년 마지막 달인 4월이 돼도 나는 인턴 자리를 못 구했다. 4월 말 의사였던 미국인 여자애가 사람들 다 있는데서 ‘아직도 못 구해 어떡하니, 내가 좀 알아봐 줄게’라고 했다. 처음에는 얘가 나를 생각해주는구나 싶었으나, 그게 머리 좋게 엿 먹인 거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자기가 좋아하고, 평소에 나랑 친하게 지내던 재미교포 남자 앞에서 나를 쪽팔리게 한 거였다. 도와주긴 뭘, 연락도 안 됐으니까. 좋은 머리를 나를 엿 먹이는 데 썼구나 싶었다. 나쁜 년!
5월 초가 돼서 앤아버에 있는 Bioscience 회사 인턴 오퍼를 받았다. 날아갈 듯 기뻤다. 미국에 남을 수 있으니까.
그 해 여름 많이 행복했다. 출근 전 골프 연습장에서 연습을 하고, 점심 때는 동료들과 수제 맥주집에 가서 햄버거와 맥주를 먹고, 저녁엔 다시 연습장으로. 일도 재미있었다. 골프 연습장 유일한 동양인 여자였던 내게 백인 할아버지들이 혹시 박세리 아니냐고 몇 번 묻기도 했었다. 당시 예쁜 미쉘위도 유명했는데, 왜 다들 박세리라고만 묻는지.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했다.
30년 인생 최대 도전이었던 MBA 첫 해는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p.s. 미시간도 학자금 대출 제도가 있다. 많은 학교들이 대출을 위해 미국에 사는 연대보증인을 요구하나, 미시간은 필요 없었다. 미시간의 학생들을 믿고 대출해 준다. 대출 덕에 MBA를 중도 휴학 없이 2학년도 계속할 수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